제목 | 귀향(歸鄕;homecoming) 체험 -아버지의 사랑- 2013.3.10 사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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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3-03-10 | 조회수31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3.3.10 사순 제4주일
여호5,9ㄱㄷ.10-12 2코린5,17-21 루카15,1-3.11ㄴ-32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집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의 집입니다. 하느님 계신 곳이 원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입니다.
깨달음과 더불어 고향에 온 듯 마음 편안했습니다. 하여 아버지 계신 고향집을 찾듯, 성당을,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느님 계신 곳이 고향집이라는 깨달음이 커다란 위로입니다.
데레사도 친정아버지가 다녀가신 기분이래요.”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은 친정아버지와 같은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인데 새삼 어디 천국에 가겠다는 말입니까?”
수도형제에게 던진 제 자신의 말이 또 깨달음이었습니다.
지금 여기 천국을 놔두고 또 무슨 천국을 들어가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눈만 열리면 지금 여기가 아버지의 사랑 가득한 아버지 계신 고향집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묻는 순례자의 물음에 위와 같이 대답했다는 어느 수녀님의 답변도 화두처럼 잊혀 지지 않습니다.
어느 선사의 임종 전, ‘어디로 가시느냐?’에 대한 제자에 물음에 대한 답 또 심오합니다. 결국은 하느님이 고향임을 암시하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장소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의 돌아 온 작은 아들을 얼싸안고 있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그림을 보며
예외 없이, 우리 모두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평생과제를 부여 받고 있습니다.
강요하거나 강제하거나 간섭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작은 아들의 당돌한 요구에 할 말도 많았겠지만 모두 접어두고 작은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여 군말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는 아버지의 깊고도 깊은 사랑입니다.
꿰뚫어 통찰하신 아버지의 지혜입니다. 자비는 그대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아 철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길 뿐이 없습니다.
회개의 깨달음의 열매 역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작은 아들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 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체험을 통해 깨달아 제정신의 철이 들 때까지 한없이 기다린 결과입니다. 아버지의 놀라운 인내의 사랑이 마침내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랄 불릴 자격을 획득합니다.
불행을 자초하여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요.
있든 없든 자녀다운 품위를 지니고 자녀답게 살 때 있습니다.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시켜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당신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유지되는 세상이요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보고 배우는 사랑이요 유전되는 사랑의 DNA, 희망의 DNA, 믿음의 DNA입니다.
나이 들어 철이 들면서 부모님의 신앙이, 사랑이 하나하나 떠올라요. 밤, 새벽어둠에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눈뜨면 어둠 속에서 기도하시는 부모님의 기도 소리였어요. 부활 때나 성탄 때는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해 몇 날 음식 준비하는 어머니였어요. 아버지는 의심 없이 하느님을 완전히 믿으셨어요.”
자녀들에게, 또 이웃에게 뿌려지는 사랑의 씨들은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음을 봅니다.
때가 되니 작은 아들의 회개를 촉발 시키지 않습니까?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뿌려지는 하느님의 사랑, 믿음, 희망 역시 DNA의 씨가 되어 때가 되면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인에게나 죄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똑같은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큰 아들 같은 이들도 있고 작은 아들 같은 이들도 있습니다. 의인도 있고 죄인도 있고,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 끼리끼리 어울리는 현상 역시 인간현실입니다.
공존 공생케 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아마 아버지의 이 말씀을 듣고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환대에 질투하며 종처럼 살았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던 큰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 회개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전환을 통해 큰 아들 역시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상처를 늦게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슬픔이나 상처 역시 평생 갔을 것입니다.
옹졸한 큰 아들의 말에도 아버지의 상처 역시 컸을 것입니다.
상처 중에 깊어지는 사랑이요 사랑 중에 치유되는 상처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라는 책 제목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라는 시도 같은 맥락 안에 있음을 봅니다.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실현된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되는 진행형의 역동적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미사잔치를 열어주시고 사랑의 상처를 치유해주시어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하여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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