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면세계의공간을 찾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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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3-03-22 | 조회수36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내면세계의 공간을 찾자 들어 있는 기쁨의 자취를 공개해도 좋다고 허락한 한 부인은 편지를 보내왔다.
벌컥 내시는 상황이 시작되면 아무도 저를 찾을 수 없는 장소로 도망쳐 숨어들곤 했어요. 처음에는 우리 집 정원의 한쪽에 빽빽이 서 있는 전나무들 속으로 숨어들었지요. 지붕 위나 지하실 나뭇가지들이나 다른 덮게들을 이용하여 숨기도 했고요. 가장 즐겨 숨어든 곳은 마을 성당 안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의 긴 파이프들 뒤였어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가장 즐기는 장소는 아무도 저를 찾아올 수 없고, 그리스도만이 다가오실 수 있는 저만의 작은 공간이에요. 묵상하면 저는 편안함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기쁨과 평안도 체험해요. 두려움을 느끼거나 보호받지 못하고 위험에 노출되는 듯한 상황에 놓일 때는 숨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적게 체험했기 때문에, 채워 주실 수 있는 분 중의 한 분으로 성모 마리아를 생각했지요. 옷자락을 펴시옵소서' 라는 노래를 좋아했어요. 옷자락 속으로 숨어들어 그곳에서 보호와 안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을 키워 나갔어요. 또 다른 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별장으로 가곤 했어요.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속에 제 기억으로는 하얀색의 작은 피에타상이 있었어요. 가장 먼저 그 피에타상으로 달려가서 떨어내고 깨끗이 청소하고 주변을 정리했어요. 그 피에타상을 새로 장식하기 위해 이리저리 꽃을 찾아다녔지요. 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큰 평화를 느꼈어요. 지속했던 일종의 전례행위였습니다. 저는 그 피에타상이 부서진 채로 땅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던 날 제가 느꼈던 아픔을 지금까지도 생생히 잘 기억하고 있어요. 본질적으로는 이 전례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린 시절의 그 행위의 자취' 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제가 압박감을 느낄 때, 저희 성당 안에 있는 피에타상을 가장 즐겨 찾아요. 틀림없이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 곁으로 숨어드는 것이지요. 저는 벌써 그곳에 저의 고통과 분열, 어두움, 그리움 같은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서 저의 내면에 안식의 공간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회상이 퇴행적인 행위이거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도망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기도와 묵상도 일종의 합법적인 퇴행으로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작업에 힘을 제공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삶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영적 어려움들을 묵인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도중에, 어린 시절의 자취를 더듬다가 기쁨을 가질 수 있는 원천과 안식처인 공간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안식처에 대한 어린 시절의 자취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는 사실 때문에 대리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발견하여, 자신을 힘들게 했던 어머니 사랑의 결핍에 대하여 단순히 불평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운 것이다. 기쁨의 자취를 발굴하여 오늘날 의식적으로 새롭게 현실화시켜 가는 것은 그녀의 영성에 큰 도움이 된다. 자극이나 조언에 좌우되지 않고, 어린 시절의 체험과 그 외의 삶의 체험에 바탕을 둔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의욕에 따라 흔들림 없이 살아가게 된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에 어떨 때 가장 행복함을 느꼈으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 나갔는지 고요히 생각해 보게 하면 자신들의 내면에 무엇인가가 솟아오름을 예외 없이 느끼곤 했다. 상처들로부터 벗어나오기 위하여 1년 이상을 시도하면서 고생했던 방법보다 훨씬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곤 했던 것이다.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집안에 긴장감이 맴돌면 언제나 혼자 물러나와 있었다고 어떤 식으로 혼자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주 몇 시간씩 흔들의자 위에 앉아 의자를 앞뒤로 흔들면서 때로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추억을 상기해 냈다. 좁은 공간으로 숨어든 것이 아니라, 흔들의자에 앉아 내면의 평화를 회복했던 것이다. 일어나고 있는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다. 가족 안의 갈등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이나 유모차를 연상케 한다.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어주지 않고 노래까지 불렀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말로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심하게 하거나 어려움이 생겨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움이 되는 말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흔들의자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해 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부인은 이런 추억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내면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자 매우 당혹해했다. 영육간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행한 치료와 여러 가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느꼈다. 기쁨을 가질 수 없었다. 숲에 대한 기쁨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잔뜩 밀려온 외로움에만 시달리곤 했다. 있을 수 있는 방법과 삶을 즐거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었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녀에게 조언해주는 치료자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치료자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어린아이, 참된 자아와 그녀는 이제 다시 만나야 했다. 차츰 회복될 것이고, 생동감이 솟아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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