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소순태 씨의 글 번호 #79930[거짓말과 부정직의 차이점]의 질문의 글은
이곳 굿뉴스의 성경 묻고 답하기의 #6716[파라오가 왜 벌을 받았을까요?]의 질문을
그대로 퍼 담은 내용이다.
누구의 글이라고는 밝히지는 않겠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까.
문제는 #79930의 글은 소순태 씨의 글이고
그는 이 내용을 그의 개인의 글 #1355로 다시 게시했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 그의 글에서의 질문이란 게
굿뉴스 #6716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자기 것인 양 했다는데 있다.
분명히 그는 자기 글에서의 그 질문을 누구의 것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다.
이런 글[또는 ‘것’]을 거짓 글이라 해야 하나, 부정직한 글이라 해야 하나!
제 생각은 옮겨온 것은 자기 것이 아니면 최소한 그 질문의 출처는 밝혀야 할 게다.
그럼 ‘정직과 거짓’을 떠나서 질문과 답의 그 본질을 들어가 보자.
우리가 잘 아는 ‘아브람과 사라이’의 ‘이집트로 간 아브람(창세 12, 10-20)’의 내용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박요한 영식 신부님 저서 ‘구약 6’의 ‘창세기 1권’
[‘성서와 함께’출판사. 2010년 발행]의 171-182쪽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사라이를 누이로 소개하는 이야기가
세 번(12,10-20; 20,1-18; 26,1-11)이나 나온다.
그 첫째 이야기(12,10-20)는 세 단계로 되어 지는데 각 단계마다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문제는 기근이며 해결책으로 이집트로 이주한다(10절).
이주는 또 다른 문제를 발생하여
사라이의 미모로 아브람이 목숨에 위험을 느낀다(11절).
해결책으로 거짓말을 한다(13절).
이게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것 같지만
사라이가 파라오의 후궁이 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14-16절).
주님이 개입하여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고(17절),
진실을 안 파라오는 아브람을 꾸짖고 돌려보낸다(18-20절).
이 첫째 내용만 12쪽 분량으로 설명이 상세히 되어 있다.
문제는 질문자를 포함해 저와 몇 분이 아브람이 ‘거짓말’을 한 것을 전제로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꾸짖지 않고 파라오를 꾸짖느냐?’라는 걸 문답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렇지만 소순태 씨는 이게 '거짓'이 아니고 ‘부정직’이라면서
이곳 저곳 비판조로 게시하며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거짓말을 했느냐, 부정직하게 했느냐?’라는 건 그게 그 말이다.
소순태 씨는 그의 글에서 두 가지 경우를 들어 ‘부정직’이라고 정의하고
‘거짓’의 정의에 대해서는 강하게 힐난한다.
그 두 가지는 아브람과 사라이가 잔꾀(trick)를 부렸기에 부정직한 것이요,
두 번째는 아브람의 속임수(deception)이기에 부정직한 것이란다.
잔꾀와 속임수, 다 그게 그 말이 아닌가! 표현은 '거짓'일 게고 내용은 '부정직'이리라.
이 성경 내용의 핵심은 ‘인간의 잔꾀로는 신변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고
하느님의 개입만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이 큰 틀의 숲을 외면한 채 나무 하나로 이곳저곳 게시하는 것은 좀 그렇다.
아브람의 잔꾀가 소순태씨 그의 주장대로 ‘부정직’한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중요한가?
정작 중요한 것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인 양 떠벌이는
그 부정직한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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