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리아 막달레나 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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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3-04-06 | 조회수34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마리아 막달레나는 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나?
어제는 도저히 마리아 막달레나가 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빈 무덤임을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자신은 그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는지 그 마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김혜윤 수녀님의 평화방송 강의를 들으면서 불현듯 깨달음이 왔습니다. 평화방송에서 현재 방송 중인 강의인데 김혜윤 수녀님의 구약 노트라는 강의입니다.
"모든 것은 때와 시기와 장소와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극도로 아주 절박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생명으로 거듭나는 일이 그다지 발생을 자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사건도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사건이잖아요. 그죠?
그런데 거기에서도 전제 되는 게 있는데 뭐냐하면, 아주 극도의 가난함이 선택된다 라는 거예요. 말구유에 태어나시잖아요. 추운 밤에 어디 뭐 애기 날 때가 없어서. 뭐라고 할까요? 아주 절박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고런 조건에서만 말씀이 사람이 되실 수 있다는 거죠."
아하, 그랬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씀까지 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예수님을 위해 할래야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는 그 극도의 절박한 거기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서 울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뭔가 더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었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것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보통 그러지 않습니까?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때에 웁니다. 서서 울면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할 수 있는 남아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쪽으로 들여다보는 것, 그것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는 빈 무덤이었지만 어쩌면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않는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 이때에 한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앉아 있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분의 천사들이 요 앞전에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계시지 않으셨을까? 계시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에 두 천사가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빈 무덤임을 확인하고도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그 절박함이, 그 희망이 두 천사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다고 느낀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비로소 살아계실 때에 늘 부르셨듯이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는데 이는 '스승님!' 이라는 뜻이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두 번에 걸쳐 돌아섰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무엇에서 돌아섰다는 말씀일까? 이 말씀은 좀 더 묵상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은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모시고 싶은 열망과 희망이 아주 절박했기에 입은 은총이라고 묵상을 정리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저 또한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기를 청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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