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자기의 자비' 차이 [예수님의 탄생] | |||
---|---|---|---|---|
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13-04-08 | 조회수37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그렇다고 해서 언제든지 죄악으로 살 수 있다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말합니다.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므로 사람은 죄악으로 살 수도 있다는 황당한 '자기의 생각으로' 정하여 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그런데도 사람이 '자기의 마음으로' 자비를 결정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각하고는 많이 달라도 다른 것이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지만, 사람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 어디에도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가리켜 '하느님의 자비'이다고 가르치는 부분은 없다 할 것입니다. 이같은 잘못된 오해에서, 사람은 자기가 죄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의 타락과 같은 유혹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이 내렸다" 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은총 때문에 죄악을 저지르도 좋다는 것은 어떤 성경의 가르침에도 없다고 봅니다. 자비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죄악으로 살아도 좋다는 선택은 유혹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자비'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하느님께서 결정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죄악을 경험하고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내세우며 결코 죄악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대항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가 죄악을 직접 행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는 이미 죄악에 사로 잡혀져서 그 죄악에 함께 참여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 죄악을 꾸짖는 사람은 죄악에서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자비'에 매여 사는 것은 <자기 죄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매여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에 의해서 죄는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요한 5, 14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악에서 죄를 지어도 좋다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거스리게 하는 '자기의 자비'에 따라서 죄악을 선택하여 자기 죄 안에서 죽어 갑니다. 죄악에 무관심한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은 '자기의 자비'로 죄악의 종살이로 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게 합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이 악의 유혹자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은 바로 인간 '자기의 자비'에 의한 죄와 타락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서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악의 목소리에 근거하여, 사람은 하느님을 거슬러 말씀에 불순종하고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죽이시지 않는다는 '자기의 자비'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후로 죄악은 인간의 땅에서 설치게 되어졌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오해함으로써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의한 죽음 속으로 점점 더욱 결박되어져 갔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이미 내포되어져 있었던 점을, 사람은 여전히 지금의 시대에서도 '자기의 자비'에 의존하며 알려고도 애쓰지 않는다 할 것입니다. 천사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이다고 말합니다(교리서 참조). 이와같이 사람도 '하느님의 자비'가 아닌 '자기의 자비'에 대한 자신의 선택에 따라 돌이킬 수없는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 때문에, 죄악을 행함과 그 죄악에 무관심해도 좋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악의 유혹에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리고자 하는 사람의 약한 의지에 근거하여 생겨지는 '자기의 자비'에 대한 최후의 선택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 때문에, 죄악을 할 수 있고 또한 그 죄악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방관의 침묵'이 결단코 <하느님의 자비>가 되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죄악과 죄악에 대한 방관적인 침묵이 아닌 것입니다. 그같은 자비는 인간이 선택하는 자비의 유사품이지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자비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 자기의 죄악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가 발휘되시는 것입니다. 죄악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다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악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인간과같이 방관하는 것은 아니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은 이같은 인간의 어리석고 잘못된 '자기의 자비'에 대하여 '죄악된 사슬'을 끊어버리시고자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그러므로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인간은 어떠한 죄악에 있어서도 변명할 수 없게 되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죄악은, 죄악으로 분명히 드러나게 하시어, 사람이 죄악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 것(성령의 거스림)을 공정하게 심판하게 하셨으며 여기서 인간 자신이 '자기의 자비'에 의존하지 않고 죄악에 대하여 용서를 빌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 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9, 15 - 16 참조)] 이것으로 사람은 <자기의 자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함을 참으로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바라시는 사람에게는 당신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자비를 저버리는 사람에게는 당신께서 자비를 거두어 버리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죄악을 죄악으로 여기는 사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하느님께 그 용서를 청하는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악을 죄악으로 여기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죄악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고 또한 죄악을 방관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벗어나서 죄악을 저지르거나 혹은 죄악의 고통에 방관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고 준엄하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때에 한한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 (로마 11, 22 참조)] 예수님의 탄생으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나신 사랑은 죄악의 고통과 죽음을 없애는 사랑의 힘이셨습니다. 죄악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방관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무덤에서의 다시 살아나심은, 죄악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투쟁하셨음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투쟁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루카 23, 46 참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