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1 조회수494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I tell you the truth, my Father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in my name.
(Jn.16,23)


제1독서 사도 18,23-28
복음 요한 16,23ㄴ-28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거나 얻지 못할 때 과연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거나 얻지 못하면 후회해하고 안타까워합니다. 또한 원하는 것을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인생은 원한다고 다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요. 아니 원하는 대로 이뤄져서도 절대로 안 되는 삶입니다.

언젠가 마트에 갔다가 울고 있는 한 어린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매장 안에서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떼를 쓰며 울더군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힘들자 잠시 뒤에는 아예 바닥에 엎어져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떼를 씁니다. 그 모습에 ‘웬만하면 좀 사주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마로 보이는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 이 장난감 똑같은 것이 집에 있어, 없어? 그리고 이 장난감 가지고 놀지도 않잖아?”

이러한 논리적인 말에도 아이는 막무가내입니다.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하는 것을 사줘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원하는 것을 꼭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하는 삶.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것을 하는 삶입니다. 내게 꼭 필요한 것, 세상에 필요한 것,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필요한 것보다는 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강조하시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해달라는 것이 어디 한 두 개였습니까? 그런데 그 해달라고 청했던 모든 것들을 다 들어주셨나요? 아니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여기에 답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할 때에는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는 분이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냥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이 먼저이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 안에서 필요한 것이 먼저라는 기준을 잊지 말라고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는 분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도하기 전엔 내가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닉 부이치치)


횡단보도. 내가 원한다고 아무데나 건너서는 안 되겠죠?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 만들기

성소국장이라는 소임을 2010년에 맡았으니 벌써 4년째이네요. 그런데 성소국장으로 있으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중간에 그만 포기하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또 한 부류는 이렇게 포기하는 학생들과 달리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이지요.

며칠 전에도 한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꼭 신부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열정을 표현했지만 저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 가지 상황이 도저히 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본인은 저렇게 강렬히 원하는데 도와주지 못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는데, 다른 누구는 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포기를 하고 있네요. 물론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고 나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신학교 생활을 그 누구는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할까요?

어제 휴학 중인 신학생들을 만나서 그동안의 생활을 이야기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신학생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신부님, 밖에서 생활하다보니 신학교 안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싫어하는 지금의 내 자리는 누군가 바라보며 간절히 원하고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서는 이를 깨닫기 쉽지 않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자리만을 탐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를 만드는데 집중하면 어떨까요? 그때 내 자리를 좀 더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