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월24일(금) 서소문밖 형장에서 9위 순교하신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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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유경 | 작성일2013-05-23 | 조회수35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김아기님은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 한아기(韓阿只) 님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아기 아가타님은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다음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 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강원도 강촌 출신의 박아기님은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아기님은 남편, 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남편과 큰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아기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 내셨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형관의 갖은 유혹과 고문에도
박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7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셨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廣州)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도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하였다.
그리고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신자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님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 주어
이광헌님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刑問)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냈다.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5월 24일 남명혁(南明赫) 님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한아기 바르바라님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님에게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 김업이 님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 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8세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셨다
행복을 꿈꾸던 결혼이 힘없이 무너졌을 때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주님 손을 잡고.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박희순 루치아님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나,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 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로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님과 조카의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박희순님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全敬俠)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님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박희순님은 언니 그리고 전경협님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박희순님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서울에서 태어난 남명혁님은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더욱 열심히 살아
이광헌님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신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방문하였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신자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 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 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광헌 님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리기를 바랐던 남명혁님은
한창나이인 38세에 자신의 뜻대로 순교하셨다.
성 권득인 베드로 님 * 주교회의 중앙 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모든 가족이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여 석방되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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