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이 나의 귓전을 울리는(루카 7, 11-17)
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편도 없고 오직 하나의 희망이었던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크고 작은 고난이 닥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반응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내가 무슨 죄가 많기에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가?” 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또 다른 반응은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분노하는 것입니다. 혹은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말을
하지 않거나 슬픔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성체 앞에서 그 고통을
솔직하게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에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너무 힘들어요. 저 어찌하면 좋아요?” 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고통이 멈춰지지 않는다면 고통이 큰 만큼 그렇게 성체 앞에서
하루 종일 야곱처럼 하느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많은 경우 고통이 큰데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의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십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자상하심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서는
그가 고통에 겨워 넘어질까 안스러워 그 곁에서 위로를 해주시는 분입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의 저자 글로리아는 그의 책 말미에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머니 태중에서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한 번도 나를 떠나신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내 자신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사건이나 아픔까지도 그분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육신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쁘지 않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내 영혼이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주님께서는 시들어 가고,
죽어있는 그 영혼에게 확신 있게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바오로야, 마리아야, 데레사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그 불안에서 고통에서 일어나라.”
사도들은 감옥에 갇혀서도 기쁨 중에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목숨을 잃을 때조차도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말하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기쁘지 않고 평화롭지 않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갖추어져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라는 이 말씀이
나의 귓전을 울리는 한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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