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일어나라" - 2013.6.9 연중 제1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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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3-06-09 | 조회수45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3.6.9 연중 제10주일 열왕17,17-24 갈라1,11-19 루카7,11-17
생명의 빛 눈부신 희망의 달, 신록의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6월의 수도원이나 미사의 분위기는 그대로 하늘나라의 실현 같지만
인생은 하늘나라인가 고해인가? 얼핏 보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해의 현실 같습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조우하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생명의 주님이 아니 곤
주님이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인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느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울지 마라.”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외아들을 잃은 사렙타의 과부나 나인 고을 과부의 슬픔은 얼마나 컸겠는 지요. 이런 어머니의 슬픔의 깊이에 도달하여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어제 조카네 집에 축복식 차 방문했을 때 카드를 펼쳐보니, “엄마 사랑해요.”라는 서툰 글씨였지만 아이에겐 엄마가 전부입니다.
성인들의 ‘하느님 사랑해요.’라는 말의 무게를 지닌 아이의 고백입니다. 만일 이런 사랑스런 자식을 잃는다면
슬픔의 저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슬플 때는 울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과부의 울음이 진정 되자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어제 읽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대비는 그대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보살처럼, 고해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중생들로 인해
‘울지 마라.’나인 고을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절망하지 마라.’
절망스런 처지에 있을 때 찾아주시어 위로와 힘을 주시는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 샘솟는 활력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십시오.
“일어나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외아들의 죽음과 더불어 과부의 마음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절망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영혼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제가 늘 즐겨 인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이다.’ 라는 말입니다.
정말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죽을 때가지 끊임없이 넘어지면 일어나고…하는 과정입니다. 믿음의 탄력이 떨어지면 내적으로 서서히 무너지고 망가지기 마련이며
의미 깊게 들은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두발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하여 바오로 사도는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십니다.
“찬양하라.”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아들의 소생기적을 목격한 이들의 즉각적 반응은
유비무환입니다. 영육의 건강에 하느님 찬양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유별난 기적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찬양하는 삶이 건강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여 바오로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하십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삶의 기적을 잘 깨닫게 합니다.
장례미사 때마다 은혜로이 목격하는 사실입니다.
몸과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픔을 주체치 못하는 믿지 않는 이들의
다음 사렙타 과부의 고백은 일종의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이보다 더 좋은 하느님 찬양과 감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눈만 열리면 주님 베풀어 주신 사랑의 기적이요
오늘 연중 제10주일
“울지 마라.” “일어나라.” “찬양하라.”
참 신기하게도 바오로의 권고와 일치합니다. 주님 안에서, 끊임없는 기도로 ‘넘어지면 일어나는 일’에 항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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