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말씀이 나의 영혼을 감싸게 될 것입니다.(루카 7, 36-50)
오늘 복음에서 죄인인 여인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앞에 함께 있는데
대조적인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죄인인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주님을 의심하고 타인을 단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서 다윗왕이 자신의 죄를 모르다가 나탄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자 뉘우치는 것처럼 그렇게 바리사이들도 자신의 죄를 모릅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고도 자신은 임금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사랑하시기에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이나 다윗의 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의 필요한 은총을 다 베풀어주시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원인이나 힘들다고, 혹은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낙태를 합니다. 자신의 자녀를 돈을 주고 죽이게 하는 것이 바로 낙태 시술이지만
눈에 안 보인다고, 남들도 다 그런다고, 가족계획 한다는 명목 하에 그렇게 합니다.
또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지만 TV나 영화 등을 보면서 남의 아내나 남편을
마음으로 탐할 때도 있고, 또 바람을 피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모고해성사나 모령성체를 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침을 뱃고 채찍질을 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판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의
예를 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둘 다 빚을 갚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살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대로 갚는다면 이 세상에 주님 대전에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고 기도를 하고
희생을 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길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사람을 죽이고 쉽게 “죄를 지었습니다.” 한다고 그 죄가 완전히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인처럼 자신의 죄를 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아파하고
죄송스러워하며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겸손이 중요합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을 모십니다.
우리의 모습이 죄인인 여인의 모습이 되어 겸손되이 그분의 자비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의 영혼을 감싸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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