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를 통해 요한 복음사가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무엇일까?
저는 회개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38년간 한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신념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 사람은 자기나름의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38년간이나 한 가지 집념을 위해 저토록 기다릴 수
있었겠는가? 나 같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38년을 한 곳을
향해 투자할 수 있었을까? ...
"물이 출렁거릴 때에 자신을 못 속에 넣어 줄 사람만 있으면 나으리라."는
아주 강한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 확신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다가가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서 발견한 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한 번 정해 놓은 어떤 확신을 내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저는 그동안
생각해 왔고 또한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의 단 한 말씀에
38년간 그 길만이 자신이 건강해질 길이라고 믿고 기다리던 것을 내려 놓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것이 이 텍스트를 통해 우리가 발견해야할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은 자신이 그토록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동안 살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요.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가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한 말씀을 듣고 38년간 가지고 있던 자기 신념을 내려
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간 오직 한 가지 자기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을 찾아 오시어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건강해지고 싶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야 건강해질 수 있는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병자의 고백을 통해 저 자신이 늘 하고 있었던 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이웃 사람들이 나를 돕지 않아서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쟤가 다가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지가 먼저
잘못해 놓고 잘못했다고 다가오지 않으니 내가 어찌 용서를 해 줍니까? ..."
이렇게 고백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쟤가 먼저 너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그렇게 자리깔고 누워있지 말고 네가
먼저 일어나 네 들것(네 문제)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쟤가 먼저 너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네가 네 문제를 깔고
누워 있는 것이 네 문제라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그가 다가오길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 일어나 네 들것(네 문제)을
들고 그에게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고 하시는 장면입니다.
38년간 자기 확신을 가지고 한 자리에 누워 살았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한 말씀을 듣고 자기 길을 버릴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게 가능하고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이 궁금증 앞에서 그동안 묵상해 온 사도 바오로의 회심 사건과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치유되는 사건이 떠 올랐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의 한 말씀을
듣고 회심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를 묵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새로운 길을 사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물음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도대체 예수 그는 누구인가? 누구길래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면서 그를 따를까? 그를 따르면 분명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데 ... 예수 그는 참으로 누구란 말인가?
누구길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그가 부활했다고 하며 그를 믿고 따르는가?"
이러한 물음이 그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저는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이를 만나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을 온 마음에 담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만나 주시자
그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분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저는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벳자타 못 가에서 38년간이나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길을 제시하자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런 물음이 저에게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혹시 그 소문으로만 듣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
그가 그 순간 그 말씀을 자신에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과연 38년간이나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던 길을 버리고 순식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 없는 소리입니다.
한 번 솔직하게 생각해 봅니다..
내가 38년간 나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신념이 있는데 왠 낯선 남자가 그것이 아니고
자신이 말하는 대로 해 보라고 하면 단 번에 따를 수 있겠는가? ...
그런데 이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 한번에 듣고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확실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가는 데도 어떤 과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체험을 통해 고백할 수 있는 점은,
한 말씀을 듣는 순간 제 영이 그 말씀이 주님의 말씀인 줄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줄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세례 전에 한 말씀을 듣고 회심해서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부르심이고 초대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벳자타 못 가의 병자도 처음 예수님의 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긴 했지만 자신을 건강하게 해 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다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까지 무척 그분이 누구이신지 만나길 갈망했고
궁금해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그를 찾아 오시어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죄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을 건강하게 해 주신 분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 병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확실히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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