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7월20일(토) 서소문밖 형장에서 8위 순교하신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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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유경 | 작성일2013-07-20 | 조회수44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열심한 신앙 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님은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님은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님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님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님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셨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奉天)의 친정으로 돌아온 이매임님은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조카 이정희와 영희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셨다. 이영희님이 동정 생활을 결심하여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4월 초 이매님임은 남명혁, 이광헌님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하셨다. 마침내 4월 11일 자수하여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2세에 순교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님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님과 친하게 지내셨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님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님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님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쯤 형 이광헌님과 함께 입교한 뒤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님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뒤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셨다. 1839년 4월 7일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동정 순교자 이영희님은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님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님과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셨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님과 함께 살며 신앙 생활을 하셨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刑問)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님은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셨다. 14세 때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고, 부모를 여읜 뒤로는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 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 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아홉 살 때 서울의 친척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때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셨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님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님은 정신을 가다듬고포청으로 끌려가셨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님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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