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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성 바르톨로메오(Bartholomaeus)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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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또는 바르톨로메오)는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림 받았다는 기록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필립보의 인도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요한 1,47)
는 평을 들은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와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설교하였고,
그곳에서 아스티야제스 왕에 의하여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는 카스피 해안의 아바나폴리스,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바르톨로메우스의 복음서는 위경이고, 프세우도-젤리시오에 의하여 단죄되었다.
그의 문장은 칼과 벗긴 살가죽이다.
* 가톨릭 굿뉴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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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필립보의 도움으로 주님을 만았을 때
주님께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요한 1,47) 라고 불림 받았던
사도 성 바르톨로메오 님이시여,
저희도 거짓 없는 영성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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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알라르의 성녀 에밀리아(Aemi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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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부터 30세까지 비알라르의 성녀 에밀리아(Aemilia)는
홀로 된 그녀의 부친을 도와 드리며,
자신이 태어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의 게일락(Gaillac)에 있는
부친의 소유지에 살던 어린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 후 1832년에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녀는
그 돈으로 게일락에 집을 구입한 후부터
조직적인 방법으로 자선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를 도우려는 다른 지원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성녀는 수녀회를 설립하였고,
1835년에는 알제리(Algeria)에 제2의 활동 기지를 세웠다.
그로부터 그녀의 사업은 날로 발전하였으나
알제리의 한 주교와의 분쟁으로 인하여 큰 공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결국 1842년에 그 주교는 에밀리아 원장을 파문해 버렸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결국은 자신의 공동체와 함께 프랑스로 철수해야 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성녀 에밀리아 원장의 수도회는
예루살렘과 호주 등지를 포함하는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이 수도회는 발현의 성 요셉 수녀회로
초창기에는 비록 알제리에서와 같은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잘 극복해 나갔다.
성녀 에밀리아는 매우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진정한 사랑의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1951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거행된 시성식에서
성녀 에밀리아는
‘현명하고 이해심 많으며 또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성녀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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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부터 어린이와 어려운 이들을 도우는 일에 몰두하다가
'발현의 성요셉 수녀회'를 설립하여 자선 사업의 열매를 맺으신 님
설립한 수녀회가 교구장 주교와의 갈등으로 큰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세계 곳곳에서 더욱 번성하였으니
현명하고 이해심 많으며 다정다감하셨던
성녀 에밀리아 님이시여,
교회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주님 일꾼들을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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