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목) 음8/15
聖야누아리오, 聖알퐁소 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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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벤토의 성 야누아리오(Janua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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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성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미세노(Miseno)의 부제이던 성 소시우스(Sosius)와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야누아리우스는 황급히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는 부제 성 페스투스(Festus)와 함께 체포되어
캄파니아(Campania)의 관리 앞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모두 맹수들에게 던져졌으나 동물들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들의 목을 베었다.
야누아리우스의 유해 일부는 나폴리로 옮겨졌고,
이곳에는 야누아리우스의 마른 피가 유리병 속에 모셔져
지금까지 18회에 걸쳐 공식적으로 전시되었다.
그런데 그 딱딱하게 굳은 피가 시대에 따라 묽은 피로 변한다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도 그 이유가 해명되지 않고 있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간주한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젠나로(Gennaro)로도 불린다.
*가톨릭 굿뉴스 자료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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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박해에 맹수의 밥이되는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순교자로서
기적의 피로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신
성 야누아리오 주교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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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퐁소 데 오로스코(Alphonsus de Oroz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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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에스파냐 교회에서 가장 엄격하면서도 위대한 신심가로 손꼽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자인 성 알폰수스 데 오로스코
(Alfonsus de Orozco, 또는 알폰소 데 오로스코)는
1500년 10월 17일 톨레도(Toledo) 지방의 오로페사(Oropesa)에서 태어났고,
불과 6세 때에 사제가 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그는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를 다녔다.
이때 빌라노바(Villanova)의 성 토마스(Thomas, 9월 22일)의 유명한 설교를 듣고
수도생활에 큰 매력을 느껴
22세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서원 후 30년 동안 성 알폰수스 데 오로스코는 교육과 설교 일에만 전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고해신부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는 4차례나 각기 다른 지방의 장상으로 지냈고,
1554년에는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원장으로 취임하였고,
2년 뒤에는 궁중 설교가로 임명받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즉시 귀족을 상대로 설교하여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세빌라의 원장으로 있을 때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이때 성모님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을 위한 펜으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의 모친께 대한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다.
그는 또 장상의 명에 따라 “고백록”을 썼다.
그는 1882년 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 굿뉴스 자료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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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환시를 통해
영혼 구원의 도구가 되신
성 알퐁소 님이시여
저희가 묵주 기도를 드릴 때
천상의 향기를 뿌려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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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다트의 성녀 마리아 굴리엘마 에밀리아(Maria Gulielma Aemi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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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다트의 성녀 마리아 굴리엘마 에밀리아(Maria Gulielma Aemilia)는
프랑스 로데즈(Rodez) 근방에서 태어나
샤토 드 지날에서 할머니의 손에 의해서 자랐다.
17세 때부터 그녀는 여러 가지 자선활동에 정성을 쏟았고,
세 번이나 다른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정착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아베 마르티(Abbe Marty)의 도움과 격려에 힘입은 그녀는
1815년에 빌러프랑슈 드 루에르규에 무료 학교의 문을 열었다.
약간의 반대는 있었으나 이 일은 성공적이었는데,
이곳에서부터 빌러프랑슈(Villefranche)의 성가정회가 발전되어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에밀리아 원장은 이 사업의 발전과 확장을 위하여 30여 년 동안 헌신하였다.
그 동안에 그녀는 만성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운명하였다.
그녀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 굿뉴스 자료짐에서 발췌 |
수도회 입회는 실패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학교의 설립으로
주님 사랑을 실천한 평신도
'성가정회' 발전의 기초가 되는 등
평신도 일꾼으로서의 축복을 받으셨던
성녀 에밀리아 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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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로소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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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 해안의 소도시인 캄포로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그는 콘벤투알 수도자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스트리 포빈테 수도원에 갔으나 3회원으로 받아 들여졌을 뿐이었다.
더욱 엄격한 생활을 원하던 그는 즉시 이곳을 떠나 카푸친회에 들어갔고,
여기서 프란치스코란 이름으로 서원하였다.
평수사인 그는 주로 병자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원장의 지시를 받고
탁발을 시작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고통이 뒤따랐다.
어떤 때에는 빵 대신 돌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0년 동안이나 겸손하게 탁발한 결과 그는 뛰어난 성덕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파드레 상토’(Padre Sancto), 즉 성인 신부로 통할만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덕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866년 제노바(Genova) 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기 자신도 희생자가 되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929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 굿뉴스 자료짐에서 발췌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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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순종의 10년 동안 탁발 수사로 지내면서
성인 신부의 영성을 닦으셨고
콜레라가 휩쓸던 때에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이웃을 돌보았던
캄포로소의 성 프란치스코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자신의 가난을 사랑하며 이웃을 돌볼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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