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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전례 탐구 생활19-20: 대영광송 – 말씀의 모자이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02 조회수6,777 추천수0

전례 탐구 생활 (19) 대영광송 – 말씀의 모자이크 ①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사제나 선창자가 대영광송을 시작하면 이제 전례의 분위기는 참회와 청원에서 기쁨 가득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대영광송의 첫 소절은 베들레헴 들판에 울려 퍼진 천사의 노래에서 왔습니다. 천사는 목동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이렇게 알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모든 미사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가 또다시 펼쳐지므로,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잘 맞아떨어지는 일입니다. 2천 년 전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났기에, 모든 미사 때마다 제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축성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들레헴의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렸을 때 울린 찬양의 노래를 똑같이 따라 함으로써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대영광송의 나머지 부분도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기도문은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호칭들과 찬양의 표현들로 이루어진 한 편의 모자이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대영광송의 구절마다 들려오는 성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대영광송을 바치는 신자는 구원 역사를 관통하는 위대한 남녀 인물들이 심지어 하늘의 천사와 성인들까지 하느님의 구원 업적과 그분의 영광을 두고 바치는 찬양 노래에 결합하는 것입니다.

 

대영광송은 삼위일체 신비를 따라, 먼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자 “하늘의 임금님”이라는 말로 성부께 찬양을 드리며 시작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경에 나오는 일반적인 하느님 호칭입니다. 성경 이곳저곳에서 하느님을 “전능한 하느님”(창세 17,1: 탈출 6,3)이나 “전능하신 주님”(바룩 3,1: 2코린 6,18), 아니면 그냥 “전능하신 분”(시편 68,15: 91,1)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록에서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은 거듭거듭 “전능하신 주 하느님”(묵시 4,8; 11,17; 15,3; 19,6)을 찬양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영광송도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일컬으며 하늘의 임금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느님은 왕(시편 98,6; 99,4; 이사 43,15), 이스라엘의 왕(이사 44,6), 영광의 왕(시편 24,7-10), 심지어 모든 신들의 왕(시편 95,3)으로 소개됩니다.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을 하늘의 임금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왕 중의 왕이신 분으로 인정하고, 우리 삶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받아들인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그분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단지 전능하신 임금님일 뿐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권위를 펼치기만 하는 독재자처럼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아버지로서 전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270항). 좋은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에게 좋은 것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그분의 사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대영광송은 하느님을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이자,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20) 대영광송 – 말씀의 모자이크 ②

 

 

대영광송의 둘째 부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시작하여, 우리 구원을 위한 그분의 죽음, 승리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원 업적에 관한 이야기를 1인 3역의 드라마처럼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역할’은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자 “성부의 아드님”입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5,17-18; 10,30-38; 2코린 1,19; 콜로 1,13; 히브 1,1-2 등). 그 가운데 특히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난 영원하신 말씀에 대한 아름답고 시적인 묵상으로 시작합니다(요한 1,1-4 참조). 이 묵상의 정점에서 요한은 놀랍게도 이 거룩하고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선언합니다(요한 1,14).

 

그러므로 대영광송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교사, 선포자 혹은 예언자로 보는 관점을 훌쩍 뛰어넘어, 성 요한과 하나 되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영원한 말씀이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역할’인 “하느님의 어린양”에 해당하는 대영광송의 대목에서 이야기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으로 옮겨갑니다. 이는 죄와 사탄을 물리친 어린양의 승리(묵시 5,6-14; 12,11; 17,14)와 하늘의 천사와 성인들이 어린양께 드리는 예배(묵시 5,8.12-13; 7,9-10)라는 묵시록의 주제를 되울립니다. 대영광송에서 이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르면서 우리는 묵시록에 나오는 이린양께 드리는 천상 예배와 결합됩니다.

 

대영광송은 또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한 예언의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요한 1,29 참조).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당신 생명을 바치신 새로운 파스카 어린양임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의 파스카 밤에 희생된 어린양처럼,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로 인한 죽음의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 골고타에서 희생되신 새로운 파스카 어린양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대영광송은 우리를 예수님의 “세 번째 역할”, 곧 천상에 오르신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로 안내합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는 마르코 복음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입니다(시편 110,1; 히브 1,13 참조). 대영광송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영원히 이어질 왕국(다니 7,14)은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께 겸손되이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드립니다.

 

대영광송에서 우리의 찬양은 이렇게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성부의 “외아들”에서 시작하여, 몸소 희생되심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경배를 거쳐 죄와 죽음을 물리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실로 구원 역사의 진정한 핵심이 대영광송 안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2020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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