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또는 안토니오)은
에스파냐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비크(Vich) 교구 관할인 살렌트(Sallent)에서
직물공의 아들로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183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5년 후부터 그는 카탈루냐 전역을 다니며 사목하고 피정을 지도하였다.
그 후 그는 보다 큰일을 해보려고 1849년 7월 16일
다섯 명의 사제들을 모아 설교 활동을 하는 수도회를 세웠는데,
지금은 이 회를 클라렛 선교 수도회(Claretian missionaries) 라고 부른다.
다음 해에 그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2세(Isabel II) 여왕의 요청으로
산티아고데쿠바의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이 교구의 주민들은 흥분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클라렛의 엄격하고 세심한 개혁 운동은 많은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신학교 개혁과 성직자 쇄신을 추진하면서 방대한 관할 구역을 수시로 순회하였다.
또한 결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농사법을 권장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가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협동조합을 결성하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성 안토니우스는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에스파냐로 돌아온 그는
이사벨 2세 여왕의 고해신부 겸 왕실의 영성 지도자가 되었고,
설교와 간행물을 통한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출판사를 설립하여 많은 가톨릭 서적들을 보급하였다.
또한 그는 문화 방면에도 관심이 커 에스코리알(Escorial)에
과학 연구소, 자연사 박물관, 음악 학교, 언어 학교들을 세우고,
바르셀로나(Barcelona)에는 수도자 도서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1868년의 혁명 때 그는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이사벨 여왕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제1차 바티칸(Vatican)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이후 에스파냐로 돌아가지 못하고 1870년 프랑스 나르본(Narbonne) 근처
프롱프루아드(Frontfroide)의 클라렛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1934년 2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5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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