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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 개혁 초석 다진 성 비오 10세 교황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18 조회수6,438 추천수0

전례 개혁 초석 다진 성 비오 10세 교황


근대주의 맞서 교회 쇄신 추구하며 영성체 중요성 강조

 

 

전 세계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교회 안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성 비오 10세 교황(재임 1903~1914)은 매일 영성체할 것을 강조하는 등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고자 했다. 교황은 교회 개혁과 신앙쇄신을 위해 전력을 다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쇄신의 길을 닦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을 맞아 교황이 강조했던 전례와 영성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성 비오 10세 교황.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1903년 8월 4일 레오 13세 교황의 선종 이후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치아 총대주교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추기경. 그는 박해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비오’라는 이름의 전임 교황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을 비오 10세로 칭했다.

 

베네치아에서도 사목자로 봉사하기 위해 교구 개혁을 추진했던 성인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1,10)를 사목 표어로 택하고 정치적인 교황보다 종교적인 교황이 되겠다는 사목 지침을 명확히 했다.

 

그런 만큼 교회 내 쇄신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전임 레오 13세 교황이 추구했던 사회 개혁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고 전적으로 영성적인 사명에 헌신하는 것에 주목했다. 또 신자들의 충만한 기도 생활과 자주 성사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례와 교회 음악의 혁신을 시도했다.

 

 

교회 내 개혁

 

교황은 개혁 작업을 교회 음악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의 교서 「Tra le sollecitudini」(1903)를 통해 교회 음악의 규범을 제시하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성음악의 최고 전형으로 삼았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특히 팔레스트리나에 의해 완성된 로마악파의 다성 음악을 모델로 하여 교회 음악에 획기적인 방향을 제시한 문헌은 낭만주의 음악 영향으로 전례와 전례음악 사이에 큰 갈등이 초래되고 성음악 복고 운동이 생겨나는 혼돈 속에서 교회 입장을 잡아주는 지침서가 됐다.

 

문헌은 “거룩한 신비들에 능동적 참여와 교회의 공적이고 거룩한 기도에 참여할 권리는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의 첫째요 불가결한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교황은 “적어도 주요 성당에는 성가대를 조직하는 것이 좋다”며 성가대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했다.

 

이 교서는 전례 운동을 위한 개혁적인 프로그램 제창으로 전례 운동사의 고전 시기를 시작했다고 평가된다.

 

1905년 반포된 회칙 「Acerbo nimis」에서는 종교 교육과 교리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 교령 「Sacra Tridentina Synodus」의 발표는 그의 특기할 만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주일마다 혹은 매일 영성체 할 것을 권한다. 이런 잦은 영성체와 매일 영성체는 매일의 음식으로 성찬의 빵을 모심으로써 힘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초기 교회에서는 매일 영성체를 실천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지만 이단이 성행하면서 점차 사라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를 복구하고 발전시킨 이가 성 비오 10세 교황이었다.

 

교황은 교령을 통해 영성체를 자주 할 것과 가능하면 매일 영성체 할 것을 권장했으며, 신자들의 공동 기도와 미사를 중요시하여 “미사 때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로써 기도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1910년의 교령 「Quam singulari」는 첫영성체의 연령을 7세로 앞당기며 첫영성체에 적합한 나이를 규정하는데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어린이들도 전례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고대교회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해 세례성사 마지막 부분에 그 절정으로 첫영성체가 이뤄졌는데, 중세 중기 서방교회에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측면이 강화되며 나이가 늦춰졌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공의회에서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 결과 본래 7세부터 하던 첫영성체가 13~14세로 고정됐다.

 

“성체는 천국으로 가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라 했던 성 비오 10세 교황은 이런 영성체의 강조로 ‘성체의 교황’, ‘영성체를 자주 하는 교황’으로도 불린다.

 

1911년의 헌장 「Divino afflatu」 공표는 성무일도 기도와 미사 거행을 위한 규정의 개편을 가져왔다. 이를 통해 성인은 시편들을 다시 배열하고 달력을 개정하여 성인들의 축일보다 주일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했다. 또 「로마전례성가집」의 첫 공식 판도 발행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교회 안에 매우 큰 영향을 발휘했고 이로써 그는 현대 전례 운동의 개척자로 인정받게 됐다.

 

이외 교황청을 11개 성과 3개의 법원, 5개 사무처로 개편했으며 「교회법전」을 발표했다.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생활과 학습의 새로운 과정을 신학교에 도입시켰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강화하는 학문 발전을 위해 1909년 교황청 성서 연구소도 설립했다.

 

 

단순한 삶과 겸손한 마음

 

성인은 ‘가톨릭운동’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 꼽힌다. 그리고 교계제도 아래에서 교회의 사도적 과제에 대해 평신도들과 협력함으로써 가톨릭 운동의 선구자가 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모더니즘에 대항해 직선적이면서도 강력하고 단호하게 맞섰던 그는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종합’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1910년 9월 1일부터 모든 서품 후보자와 사목자들은 반근대주의 서약을 이행해야 했다.

 

그의 재임 마지막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위협으로 뒤덮인 기간이었다. 한 서한에서 “만일 유럽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나의 온 목숨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기록할 만큼 당시 정세에 대한 고뇌가 깊었다.

 

여러 면에서 보수적이었지만 건설적인 개혁 교황이었던 성 비오 10세 교황. 생애 동안 성인으로 존경받았던 그는 결단력과 조직력이 뛰어났고 선량하고 겸손했다. 또 단순성과 오직 한결같은 선한 마음과 가난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랑했다.

 

교회를 위해 행한 개혁 활동의 긍정적인 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시도된 변화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그는 1914년 선종했으며 1954년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20년 8월 16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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