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Lk.13,3)
제1독서 로마 8,1-11
복음 루카 13,1-9
저는 몇 가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조명연’이라는 호적상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태오’라는 세례명입니다. 마지막으로 ‘빠다킹’이라는 이름도 있지요. 2000년에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이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사람들에게 불립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다 각자 몇 가지의 불리는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까?
어떤 책에서 보니 사람은 누구나 최소한 평생 세 개의 이름을 갖는다고 합니다. 첫째는 태어나면 부모가 지어주는 호적상의 이름입니다. 둘째는 주변 사람들이 정을 담아 불러주는 이름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생애가 끝났을 때 얻게 되는 이름이라고 하네요.
이 책에서는 계속해서 첫 번째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와 세 번째 이름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이름은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가늠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내가 평생 어떻게 살았느냐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두 번째와 세 번째 이름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특히 각종 악행을 저지른 사람, 사회에 커다란 해를 끼친 사람들의 이름은 어떻게 불립니까?
그에 반해 이 세상 안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고 심어준 사람의 이름은 어떨까요?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요? 맞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계속해서 회자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될 것입니다.
특히 먼 훗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의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못했느냐가 결정되는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지금이라는 시간들이 모여저서 얻게 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서 사랑을 행한 그 모든 일들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모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계속해서 나 편한 삶만을, 또 욕심과 이기심을 계속 내세우면서 살아가면서 나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이름을 형편없는 이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회개는 뒤로 미뤄서 될 것이 아닙니다. 또 과거의 일회적인 회개로 미래의 모든 죄까지 용서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바로 지금, 주님 앞에 겸손되이 나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회개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며, 멸망의 삶이 아닌 구원의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