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1월4일(월) 聖 가를로, 福女 프란치스카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03 조회수515 추천수0 반대(0) 신고


 

 

11월4일(월) 음10/2
聖 가를로, 福女 프란치스카


 


 

가롤로 보로메오(11.4)

성인명 가롤로 보로메오(Charles Borromeo)
축일 11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활동지역 밀라노(Milano)
활동연도 1538-1584년
같은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성모자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우)와
성 가롤로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좌)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또는 가롤로)
1538년 10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마죠레 호수 근처의 아로나 성(城)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세(Pius IV)의 여동생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살 때 산 그라시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로 가서 알치아티(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년 파비아(Pavia)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인 지안 안젤로 추기경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새 교황은 조카인 카롤루스 보로메오를 로마(Roma)로 불러들였다.

1560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보로메오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다.
특히 그는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o) 제3회기 동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카롤루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562년 그의 형 페데리고(Federigo)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보로메오 가(家)의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년 7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가 요청한 교리교육과 미사 전례 그리고 성무일도 작업들을
두루 감독하였으며,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그가 대주교로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또한 그는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하여 유익한 기준을 마련하였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
어린이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회 설립 및
자신의 교구 내에 거주하는 예수회를 격려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하였고,
프랑스 두에(Douai)의 영국계 대학을 지원하는데 있어서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에
11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와 6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의 성격을 지닌
‘성 암브로시우스의 헌신회’(지금은 성 카롤루스의 헌신회)를 설립하였고,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1567년 그는 주교의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시킨 것으로
주교좌가 시당국에 의하여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그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재차 그의 주교직이 산타 마리아 델라스카라의 시의원들로부터 도전을 받자,
교황은 그를 후원하고 시의회는 그들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는 어느 자객으로부터 상처까지 입었다.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온 주민들이 큰 난리에 빠졌을 때,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여
이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시의회와 교회 관할권 사이의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카롤루스는 그 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하였으며,
1583년에는 스위스 교황사절이 되어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설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584년 11월 3일 밤에 밀라노에서 사망하여
주교좌성당의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는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비록 그가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1610년 11월 1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종교개혁의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일부 시민단체 등 정치적 세력마저 비우호적인 상황에서

교회의 바른 모습을 살리기 위해 열정을 쏟으신
밀라노의 대주교 성가를로 님이시여

가치관의 갈등과 분열이 휩쓸고 있는 현세를 헤쳐나가는 저희를
천상의 기도로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프란치스카 앙부아즈(11.4)

성인명 프란치스카 앙부아즈(Frances Amboise)
축일 11월 4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과부, 수녀원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1485년
같은이름
 


성 프란치스카 앙부아즈(Frances Amboise)



 


 

프란치스카 앙부아즈(Francisca Amboise, 또는 프란체스카)
15세 때에 요한 공작의 둘째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실로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질투심이 강하고 음침하며 때로는 난폭하였다.
그녀는 이런 남편에게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고 큰 인내심으로 이겨냈으며,
그로인해 남편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러나 그들에겐 자녀가 없었다.

1450년 남편이 공작의 자리를 승계하자
그녀는 남편의 지위를 이용하여 하느님 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서부 낭트(Nantes)에 클라라회를 위한 수도원을 세웠고,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의 시성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 모금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457년 남편이 죽은 뒤에 그녀는 낭트 수도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지냈으며,
그 후에는 반(Vannes)의 카르멜 수녀원에서 생활하였다.
1468년 그녀는 반의 수도원에서 수녀가 되어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고,
서원 후 4년 만에 원장으로 피선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거칠은 남편을 사랑과 헌신으로 聖化시켰고
나중에는 남편의 도움으로 수도원을 설립할 수 있었으며

남편 사후에는 수도원에 머물며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한 이들을 도우는 데 몰두하신
복녀 프란치스카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저희들 가정이 성화되도록
천상의 기도로 축복해 주옵소서!...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