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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24 조회수528 추천수7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서 연중 마지막 주일이고 추수감사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세례 받은 후에 신자들은 대개 두 가지 모습, 종교인과 신앙인의 모습으로 나눠집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이 나누어지는 기준이 뭔가?

첫 번째, 종교인과 신앙인은 감사하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인은 먼저 청하고 청한 것을 해결만 해주면 내가 감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해결해주시면 감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감사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일이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미리 당겨서 감사합니다.

벼랑 끝에 서있고 사막 한가운데 헤매더라도 반드시 나를 지키시는 야훼께서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주실 것을 믿습니다....하면서 눈에 보이는 감사예물을 봉헌합니다.

이게 바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요, 이방인과 믿는 자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 종교인은 자기가 교만한 것을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늘 남의 교만만 자기 눈에 들어옵니다.

성서표현대로 하면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이게 바로 종교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재는 잣대를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그 잣대를 가지고 잽니다.

 

세 번째, 종교인은 죽었다 깨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은혜로운 말을 듣고, 은혜로운 말씀을 읽고, 남이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면

영적인 자극을 받아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면서 작은 열매라도 맺습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가 된다~ 그 뜻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머릿속에는 오만 좋은 것들이 다 들어가 있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되었는데

그야말로 쭉정이 열매하나도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끝냅니다.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해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에게 먼저 감사부터 하고 사십니까?

아니면 먼저 청하고 나중에 이루어지면 감사 같지도 않은 감사를 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스스로 의인 쪽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선인 쪽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성당에 나만한 인간 있으면 나와 봐라~

이런 마음으로 혹시 사시지는 않습니까?

 

어느 성당에서든지 터줏대감 노릇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부 신자들이 오면 아주 교묘하게 박해를 합니다.

우리 성당에서 내가 제일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사람들이 오면 아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열매를 맺고 사십니까?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도끼에 찍혀서 불쏘시게 밖에 안 됩니다.

이것이 세례 받고 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입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인으로 살다가 다행히 하느님을 체험해서 신앙인으로 바뀐 삶을 살다가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종교인으로 살다가 종교인으로 그냥 갑니다.

정말 가슴 뜨겁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못 느끼고 갑니다.

 

오늘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 날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감사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일 년 되돌아볼 때 저를 비롯해서 모두가 감사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신부님 그 모르는 말 하지도 마세요. 올 일 년 동안 우리 집구석에

얼마나 우환이 들끓었는지 아세요? 남편이라는 작자는 월급한 번 갖다 준 적도 없고

바람이 나서 전국을 돌아다녔고....얘 하나 있는 거, 그저 밖으로 돌면서.....

 

아이고, 뭐 감사할게 있어요? 신부님 참 속편한 소리하시네.”

속으로 꿍시렁 거리면서 앉아있는 사람이 14명이 앉아있는 게 보여요.

 

집안에 우환이 많고 고통이 많은 사람은 감사할게 뭐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어려운 고비고비 넘어서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 그것 감사해야 됩니다.

그 캄캄한 밤에 그 당시에는 자살하고 싶고 죽을 것 같더니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주변에 나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나와 비교할 때 나보다 훨씬 더 가진 것도 없고 감사할 건덕지가 없는데도

나보다 훨씬 더 고통이 지겹게도 많아 보이는데도 저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나보다 얼굴이 더 밝습니다. 늘 기쁘게 삽니다.

 

감사를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내고 발견하고야 맙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뭐가 기쁜 일이 있어서 저렇게 맨날 시시덕거리며 살까?

 

감사를 못하고 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욕심입니다.

욕심이 가득 차있을 때는 절대로 감사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창자 속에도 욕심이 들어가 있고

심장 속에도 욕심이 들어가 있고

입안에도 욕심이 들어가 있고 이 골속에도, 머리카락 하나하나에도

세포하나하나에도 욕심이 가득 차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입에서 죽을 때까지 감사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감사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욕심이 지배할 때는 감사가 안 나옵니다.

 

두 번째 감사를 못하는 이유는 감사를 늘 찾아 헤매는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감사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리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 찾아 삼만리’가 아닙니다.

감사는 이미 와있습니다.

 

내 자신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수도 없이 많은 감사의 옷이 입혀져

있는데도 우리는 늘 감사를 찾아 헤매는 것인 양.....

감사가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은총이 있어야 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눈을 크게 뜨면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지난 한해가, 지난 한주가, 오늘 하루가... 다 감사덩어리입니다.

 

어느 자매가 아침에 눈뜨면 밤에 잠잘 때까지 불평불만을 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성당 그 구역 그 레지오에서도

‘저 자매, 어휴! 옆에 있으면 피곤해. 뭐 그렇게 입만 열면 늘 항상 불평불만.....’

다른 사람의 눈총을 왜 안 받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 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친구가 없었습니다.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 옆에는 절대 친구가 꼬이지 않습니다.

가봐야 상처를 받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 옆에 가면 같이 어두워지고 거기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친구가 없습니다.

그분이 저를 찾아와서 자신의 문제를 면담을 청하기에 제가 어떻게 해법을 냈느냐?

어느 수녀원 피정센타를 소개해 줄 테니까 거기 있다 삼일만 있다 와라.

가능한 한 금식하면서 피정해라.

피정센터까지 안내해서 보냈어요.

 

그 자매는 성서책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노트 하나만 가지고 가서 3일 동안 내가 쉰일곱 먹을 때까지

하느님께 감사할 일을 뭐가 있는가 뒤져봐라.

가기 싫은 걸 억지로 갔습니다.

 

저도 그 자매를 위해 기도했지요.

3일 후에는 완전히 천사의 얼굴로 돌아왔어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보내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면서 노트를 내밀었는데 노트 열 두 페이지가 감사할 것으로 꽉 찼어요.

 

처음에 피정센타 가서 하루 동안은 자기가 여기 온 것 자체가 불평이었대요.

괜히 그 신부님과 면담을 하다가 독박을 써가지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바빠 죽겠는데...얼마나 부글부글 끓던지~~

왜 밥도 못 먹게 하는 거야...밥 못 먹으면 꼼짝도 못하는데...

 

궁시렁궁시렁~~ 하루를 보내고 이틀째 감실 앞에 앉아 있는데

처참하게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니까 눈물이 핑 돌았대요.

 

감실 앞에 앉아서 노트를 펴니 어릴 때 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계모 손에 자라면서 상처 받은 게 다 떠오르더래요.

 

그 와중에도 외할머니의 사랑으로 학교도 나왔고

엄마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외할머니에게서 받은 생각을 하니

외할머니에 대한 감사에서부터 하나하나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더래요.

 

“신부님, 이 열 두 페이지를 눈물로 썼어요.”

노트를 보니 군데군데 눈물 떨어진 자리가, 볼펜이 자욱 위에 나 있었어요.

‘회개하라!’

그 자매의 특기가 불평불만이었지만 피정을 갔다 온 다음에는 기쁨의 자매로 변했어요.

 

여러분에게 숙제를 드립니다.

12월 25일 성탄까지 4주 동안 여러분들이 노트를 준비하든

종이로 묶어서 하든지 감사할 것이 몇 가지나 되는지 찾아보세요.

 

성탄절 날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선물로 드렸듯이

여러분들도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세요.

 

감곡신자분들은 봉헌함을 따로 만들 겁니다.

내 일생동안 주님께 감사할 것이 몇 가지인가를 적어보세요.

아무리 지겨운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래도 감사할 것이 한 두 가지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농부들도 감사해야 됩니다.

올 한해 내가 농사 잘 지었다 하는데 이말 만큼 교만한 말은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농사를 잘 지은 겁니까?

농사짓는 여러분들이 하신 일이 뭡니까?

 

밭 갈고, 씨뿌리고, 물대고, 약 뿌리고, 돌 골라내고....그것 뿐이지

싹이 나와서 열매를 맺게 한 분은 농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추수감사 미사 때는 가장 좋은 것 봉헌해야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물이 무엇인지 어릴 때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카인은 뭘 바쳤습니까?

아벨은 뭘 바쳤습니까?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아벨은 제일 살찌고 토실토실한 양을 봉헌했고

카인은 곡식을 바쳤는데 겉에만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서

속에는 쭉정이를 다 쑤셔 넣어 하느님 제단위에 바쳤어요.

 

하느님께서 그거에 속아 넘어가실 것 같아요?

그래서 축복을 누구한테 주셨어요?

아벨한테 주었어요.

 

카인은 성질이 났지요.

그 결과 카인이 아벨을 돌로 때려죽이지요.

다시 말하면 옳게 감사하지 못할 때는 최악의 경우에는 영적살인까지 해요.

 

자기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봉헌하는 사람을 보면 아주 깔봐요.

우리 본당공동체의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됩니다.

 

감곡신자들, 감사하십니까?

1년에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찾아와서 이제는 감곡성당신자들만의

성당이라는 범위가 벗어난 지가 오래입니다.

 

한국교회의 성지가 되고 장차 세계의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순례지가 될 겁니다.

로마의 산타마리아 성당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전대사 지정성당’ 으로 임명된 것도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성지가 되기 위해서는 마스터플랜에 의해 많은 일들이 앞에 놓여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신자들에게 베풀어준 영적 물적인 은혜에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없고 대신 불평과 불만이 있는 공동체는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 여러분 들으셨을 겁니다.

“네가 왕이냐?”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나는 지상이 왕이 아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 왕’ 의 뜻의 의미를 깨달아야 됩니다.

감사는 그리스도 왕처럼 살 때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지상의 왕은 권력을 잡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은 지상의 왕이 아닙니다.

대궐 안에 안 사셨어도, 군대가 없었어도, 그분은 화해의 왕이셨고

용서의 왕이셨고, 봉사의 왕이셨습니다.

 

화해는 십자가로서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王자는 1획이 하늘이요. 3획이 땅이요.

중간이 십자가(†)로 연결이 되어야만 왕이 됩니다.

 

원죄 이후에 하늘과 땅이 끊어졌습니다.

그 끊어진 공간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이어서 王이 되셨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버리려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가정을 이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버리려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십자가 버리려하고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본당신자들도 십자가 버리고 남에게 떠넘기려고만 할 때 그 교회는 타락하고 분열합니다.

교회봉사단체가 없어지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편한 것만 찾아서 자기 십자가를 안 지려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화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용서의 왕’ 이셨다고 그랬습니다.

의노를 보이셨던 엄한 왕이시기도 했지만

끝없는 용서를 청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용서를 주셨던 왕입니다.

 

세 번 째는 ‘봉사하는 왕’ 이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부수어서 나누는 삶, 빵이 되어서 음식물로까지

봉사하시는 왕,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윗자리에 대접받기 좋아하고

알아주어야만 편해집니다.

 

교회의 모든 직책은 내가 마땅히 그 자리에 있을만해서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라도 안 앉혀 놓으면 엉망으로 살 것을 주님이 아시기에

그 자리에 앉혀놓은 것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나에게 맡겨주신

봉사직은 이것은 바로 하인직, 종의 직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꾀부리지 말고, 유세떨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서 봉사해야 됩니다.

 

글자 중에 王자가 들어간 자가 많은데

거룩할 성(聖)자는 우리는 끝없이 많이 묵상해야 할 말입니다.

자, 입 자, 임금 자입니다.

 

내가 입으로 농사짓는 것, 귀로 농사짓는 것, 십자가로 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겸손되이 묵상합시다. 아멘

 

 

-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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