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로마 교회의 발전(313-750년) : 시대 상황 4세기는 그리스도교에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유다이즘 배경에서 출발하여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아 유다교와는 독립적인 신학을 발전시켰으나, 로마제국의 박해 때문에 공식적으로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조용히 선교를 해 왔던 그리스도교는 4세기 초에 큰 전환을 맞이한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반포한 ‘밀라노 관용령’(313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으며 그에 합당한 공간과 시간을 정하여 전례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후원은 발전에 기본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서 자유롭게 신앙 활동을 하도록 선포하였으며, 그에 따른 후속 조치를 통하여 발전하도록 후원했다. 그는 312년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비록 이교적인 국가 의식이나 다른 종교의식은 그대로 놓아두었을지라도, 많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를 장려했다. 그는 로마 밀비오 다리에서 치른 막센티우스와의 전투 전에 꿈에서 본 십자가 문양(Labarum, 현재의 키[X]로[P] 십자가)을 자신의 군대 방패에 새겨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313년에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관용령’을 작성하고, 그것을 (칙령이 아닌) 교서 형식으로 동방의 지방 총독들에게 보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제국 안에서 더는 박해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보장받았다. 또한 그는 이교의 제관들이 누리던 개인 세금의 면제를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도 부여했고(313년), 십자가형의 폐지를 지시하였다(315년). 또 교회에 유증물(遺贈物)을 받을 권한을 부여하였으며(321년), 같은 해에는 국법으로 일요일을 휴일로 지정하였다. 319년(또는 321년)에는 신의(神意)나 미래를 해석하기 위한 이교적 희생 제사와 그 밖의 몇 가지 부도덕한 의식을 금지하였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수단으로서의 검투사 싸움을 폐지하였다. 그의 뜻을 따른 후대 황제들 가운데 테오도시우스는 380년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종교로 승격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한 바실리카들을 건설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위한 건물도, 그것을 건축할 재정적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라는 걸출한 후원자가 있었다. 그는 서양 역사상 가장 많은 성당을 선사한 황제로서 로마 시내에는 최소 일곱 채(비공식적으로는 열 채), 예루살렘에 최소 네 채, 올리브산 지역에 여러 채,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여러 채의 성당을 건설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례 공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당시 공공건물의 형태였던 바실리카를 선택하여 사용했으며 세례와 순교자들을 기리는 별도의 건물들도 이 기간에 등장했다. ‘바실리카’(basilica)는 ‘왕’을 뜻하는 희랍 말 ‘바실레우스’(basileus)에서 유래했으며 ‘왕의 홀’이라는 뜻이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장방형 건물을 집회소로 건축했다. 바실리카가 건축학적으로 다른 장방형 건물과 구분되는 특징은 최소한 하나의, ‘후진’(apse)이라 부르는 반원형 돔과 그 아래 공간, 그리고 종종 일련의 기둥으로 본 공간과 분리된 ‘측랑’(side-aisles)이 있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최초의 그리스도교 대성전으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었다가 후대에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에게 다시 봉헌된 라테라노 대성당 건설을 지시했으며,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324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도 지시했다. 이 모든 공사를 위해 필요한 돈과 건축가들까지 황제 자신이 충당했으며, 기존의 건물을 확장하거나 새로이 짓는 것도 격려하였다. 바실리카가 전례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단순한 구조의 ‘가정 교회’는 이제 바실리카로 옮겨졌다. 이 바실리카 양식은 이후 그리스도교 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로마의 바실리카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는 전례를 위해서 지어졌기에 공간 배치에서 달랐다. 외부의 단절하는 벽이 없이 개방되었던 공간에 예배 모임에 적합하게 벽을 쌓았으며, 주례자의 좌석과 제대가 있는 부분의 중심으로 전체 건물 내부를 배치한 점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제대 뒤로 후진이 펼쳐졌고, 여기에는 사제들이 앉는 긴 의자로 둘러싸인 주교좌가 자리 잡았으며, 말씀 전례가 이루어지는 독서대, 성찬례를 위한 제대, 신자들을 위한 넓은 공간(신자와 예비신자, 남성과 여성이 각각 따로 앉았다.), 예물 봉헌과 영성체를 위한 공간이 있었으며, 이 모든 공간은 문을 통해 밖과 연결되었다. 건물 자체는 세속 건물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적으로 대단히 단순했으며, 내부에도 가정집 같은 친밀감, 기쁨 등을 나타내는 장식뿐이었다. 현재 로마에 있는 성모 대성당, 성녀 사비나 성당,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등이 옛 바실리카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갖고 있다. 세례당과 순교자 무덤 위에 세워진 기념물들도 있었다 이미 유다인 회당에 정결례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두라 에우로포스 가정 교회에도 세례를 위한 장소가 있었다. 4세기 이래 성당 옆에도 세례를 위한 원형이나 다면체의 건물들이 건축되었다. 대표적으로 라테라노 대성당의 세례당, 라벤나의 세례당들, 중세의 유명한 건축물들을 들 수 있다(피렌체, 파르마, 피사 등 참조). 이 경우에 세속적인 형태의 건물이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해서 변형되고 이에 신학적 해석이 덧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이를테면, 팔각형 형태에 대한 우주론적 해석 등이다). 순교자들 무덤 위 또는 그 옆에 세운 조그만 건축물들도 있었다. 성 베드로 기념물, 성 바오로 기념물, 카타콤바의 사도들 기념물 등으로, 3세기에 이런 장소에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했다. 그리고 이런 기념물들은 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3세기부터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순교자 공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다. 박해의 위기에서 발전의 호기로 전환된 4세기의 교회는 외적으로나 전례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지만, 신앙의 역동성과 영성 측면에서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에는 4세기에 발전된 전례 환경에서 정착된 주교들과 사제들의 표지들과 복장, 그리고 전례 주년에 관하여 알아보려 한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9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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