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튼은 프랑스에서 화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6살에, 아버지는 16살에 세상을 떴다. 대부분 일찍 부모를 여읜 뒤 삶과 죽음을 고뇌하면서 출가한 우리나라 고승들의 궤적을 닮아 있다. 컬럼비아 대학 시절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중세 스콜라 철학에 심취하는가 하면 불교 승려와 교분을 맺기도 한 그는 26살이던 1942년 옷가지들을 할렘의 흑인들에게 나눠주고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된다. 머튼은 48년에 자신의 영적 여정을 담아 펴낸 자서전〈칠층산〉으로 일약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지만, 세속적 명망은 그의 비움과 침묵을 훼손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위험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위험이 내게서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두렵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까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에 떨 때 머튼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침묵과 가난과 ‘홀로 있음’의 축복을 즐겼다. 따라서 모든 인간과 자연이 그에게 이르러서는 하느님과 다름이 없었다.
“홀로 있음은 내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이 기도로 바뀌는 곳이며, 하늘이 나의 기도가 되고, 새들이 나의 기도가 되고, 나무에 스치는 바람도 나의 기도가 되는 곳이다. 하느님은 그 모두이시니 말이다.” (김기석 옮김)
머튼의 영성
머튼의 영성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은 그가 어떤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의 관점은 노트, 일지, 자전적 성찰, 그리고 개인적 서신을 통해 비춰진다. 그의 언어는 자주 은유, 상징, 명상을 통한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은 생활 속의 다양한 사건, 긴장 그리고 역설 속에서 형성되었다. 한 마디로 그의 영성의 핵심을 잡는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모든 삶은 역설과 모순이라는 신비 속에서 자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의 핵심은 거룩한 자비에 집중된다.” 다음은 머튼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몇가지 핵심적인 특성들이다:
순례 : 머튼은 자아와 사회적 관습의 테두리를 넘어 하느님을 추구하는 순례자로서 자신을 보았다. 머튼은 영적 여정을 더 경험할수록 더 거룩한 신비를 향해 항상 자신이 떠날 수 있다고 인식했다.
수도적 삶 : 머튼이 보았던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은 수도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평범치 않은 비젼을 가진 수도자이지만, 수도자에 불과한 사람의 눈으로. 머튼 수도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그의 믿음을 살려고 갈망했다. 수도 생활은 회심과 마음의 변화에 집중되며 사막의 경험 속에서 피어난다.
고독 : 머튼은 하느님과 공포의 어두움, 가난, 신비 그리고 변화가 드러나는 속에서 정화되는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고독의 여러 차원을 탐구했다. 그는 사랑과 관상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되는 경험을 위해 침묵과 고독을 찾았다. 머튼은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고독하지만 혼자임에 두려움을 느끼므로 이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어둠과 비움의 길 : 머튼은 자신의 죄, 상처 입기 쉬운 약함, 무지,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에 직면하게 되는 인간정신의 황폐함을 기꺼이 껴안고 받아 들였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가득히 채워지기 위해서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깨달았다.
기도의 중요성 : 머튼은 기도의 체험 속에서 감각과 몸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기도는 삶으로부터 흘러나오고 그 목표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과 모든 창조물과 살아 있는 일치가 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머튼에게 관상기도는 우리가 발견해 왔던 모습 그대로 그분 안에서 휴식을 얻으려는 방법이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그분께로 끌어당기는 하느님을 찾는 길이다. “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친구, 일, 몸. 그리고 환경이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자아의 신비로움 : 머튼은 전적으로 성령의 자발적인 움직임 안에서 살기 위하여 낡은 자아로부터의 자유로 우리를 부르고 변화로 초대하는 내면의 소리에 일깨워지기를 우리가 갈망한다고 말했다. 이 내면의 자아는 연구될 수 없는 비밀이고 기술로 달래어 드러나게 할 수 없으며, 다만 우리가 하느님 현존의 놀라움을 목격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침묵, 겸손, 이탈, 마음의 순수함을 우리 자신 안에 연마할 수 있을 따름이다.
진실한 자유의 추구 : 머튼은 혼잡, 산만, 자유를 빼앗는 인위적인 요구들로부터 그의 생활을 자유롭게 하기를 열망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실체를 보고 응답하며 하느님께만 의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수도자는 자유와 이탈의 삶, 정상적인 사회적 구조물 바깥의 ‘사막 생활’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이다”(<행동의 세상 안에서의 관상>에서).
예언자적 소명 : 머튼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를 정화시키고 빛을 주며 변화시키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할 때, 우리의 삶은 최고의 자유를 증언하고 그것을 향해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관심 : 그의 삶 속에서 관상의 폭이 증대되면서 머튼은 그가 세계와 떨어질 수 없고 또 세계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장 깊은 기도가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 된다고 믿었다. 머튼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내면의 생활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기도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짜 행동주의에 쏠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심성 : 그리스도에 초점을 둔 머튼의 수도 생활은 전례생활, 성서, 기도, 노동, 예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 안에 참여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의 우리의 삶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말해왔던 ‘관상적 삶’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각성의 삶인데, 그 어떤 것은 예수님 홀로 필연적이며 그분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그 분 안에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다”(<행동 안의 관상>에서).
오늘날을 위한 머튼
토마스 머튼은 그의 순례여행과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의 관상적 경험을 통해 풍부한 지식, 지혜, 영적인 양분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는 우리가 내면의 굶주림을 탐험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보편적 인간 정신의 깊이에 닿도록 우리를 민감하게 만든다. 머튼은 ‘영적인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도생활이라 불리는 삶을 터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삶의 모범과 글로써 수도승들과 봉쇄 생활에 불리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수도적 삶의 방식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 모두가 따를 수 있는 영적인 길로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에 영적 스승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충실하다면 관상적 체험의 선물을 모두 받을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준다. 글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