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4세기에 달라진 주교들과 사제들의 품위 표지들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듯이 예식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어떤 옷을 입는다고 되는 일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의복은 복잡한 비언어적 표지들의 집합체로서 일반적인 사회적 관점과 다른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종교 예식을 위한 복장은 결정적이고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며 서서히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민족마다 지역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거룩한 옷은 항상 공통된 요소가 있다. 주례자나 참석자는 종교 의복을 통해 신과 친밀한 관계를 쉽게 맺게 된다. 황제가 앞장서서 주교의 품위를 인정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반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는 자유화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혜택을 받기 시작했다. 황제가 주교의 품위를 인정하는 데 앞장섰다. 주교는 하느님의 자리(성당)에서 주재하며, 성부의 예형으로 사제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리아 가르침」(Didascalia Syriaca, 250년 이전)은 주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우리의 힘 있는 왕이며 하느님의 예형으로서, 주교가 너희를 주재할 때, 하느님께서 너희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locus Dei)를 다스린다.” 이 때문에 주교에게는 특별한 자리가 제공되었다. “사제석은 집 안에서 동쪽에 자리 잡으며, 중앙에 주교 자리가 있고 그 주위에 원로들이 앉는다.” 이렇듯 당시 주교좌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그것은 가르침의 상징이자 행정의 중심이며, 신적 위엄의 상징으로서 옥좌이자 승리의 상징(이교도에 대한 승리)이다. 이러한 상징주의는 이미 헬레니즘이나 구약의 후기 저술 또는 묵시록에서 나타난다. 황제는 주교에게 정부 요직에 해당하는 비슷한 권한을 부여했다 황제는 정부 요직에 해당하는 비슷한 권한과 궁정의 상위 계층에게 허락하는 특권을 주교에게 부여했다. 곧, 팔리움, 신발, 달마티카의 사용 등이다. 황제의 품위를 드러내는 양식은 동방과의 접촉을 통하여 발전, 변화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제정된 왕궁의 여러 가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교에게 주어지거나, 고위직의 사람들이 스스로 취함으로써 본디 가진 (반그리스도교적 또는 비그리스도교적) 의미가 사라지게 되었다. 예컨대 입맞춤, 신 앞에서의 경배로 무릎 꿇음, 신상과 성화에 대한 예배와 환호, 승리의 행진 등의 인사 방법이다. 또한, 원로원에서 사용하였던 상징인 시민관(로마 시대에 떡갈나무잎으로 만든 관), 의자, 관리의 옷, 관리용 의자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의복은 전형적인 황제 장식과 보석 박힌 관, 군인 복장을 약간 변형시켜 이용했다. 호칭 가운데서는 각하, 하느님의 아들, 미래의 신, 나라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 비오, 펠릭스, 영원한 자, 우리 주, 신이시며 주님, 세상의 지배자, 구원자라는 명칭을 먼저 그리스도께, 이후에는 성인들이나 성모 마리아에게도 적용하였다. 로마 시대의 복장이 성직자들의 복장으로 발전했다 로마 사회는 초기의 도시국가 시절과는 달리 점차 계층의 분화와 차별이 뚜렷해지고 복장도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의미가 강조되었다. 따라서 착용하는 사람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형태와 색상, 장식, 착용 방법 등 구별이 점점 더 두드러졌다. 로마 문화권에서 착용한 의복 종류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토가(toga)는 로마 시민이 입은 대표적인 겉옷이며 라틴어로 ‘평상복’ 또는 ‘몸을 덮는다’라는 뜻이다. 로마 시민만 입었는데 일반인은 단순한 흰색을, 철학지는 청색, 의사는 녹색, 신학자는 검은색을 사용하고 점쟁이와 예언자들은 흰색의 토가를 착용했다고 한다. 2) 투니카(tunica)는 그리스의 도리아식 키톤에서 발달한 간단한 T자형 옷으로 남녀 모든 계층에서 보편적으로 착용한 대표적인 복장이다. 옷감은 보통 흰색의 모직으로 만들었고 초기에는 길이가 짧고 단순한 형태로 토가의 속옷으로 입었으나 후기에 토가가 커지면서 사용되지 않자 옷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소매를 달아 평상복으로 입었다. 제정 말기에 귀족들은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장식을 했다. 3) 달마티카(dalmatica)는 발칸반도의 서쪽 달마티아 지역에서 유래한 의복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착용했으며, 3세기 무렵부터 널리 착용하였다. T자형의 소박하고 느슨한 복장으로 펼쳤을 때 십자형을 이루며 양어깨에서 옷자락까지 클라비(clavi)라고 하는 두 개의 줄이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뒤 귀족 계급이 입으면서 더욱더 화려해졌으며 그 뒤 중세에 와서 여러 가지 형식으로 발전하였고, 종교 의복의 모체가 되었다. 4) 스톨라(stola)는 그리스의 키톤이 변형, 발전된 복장으로 남자들이 주로 입던 투니카보다 넓고 여자들이 주로 착용했다. 길이가 발목까지 왔고 소매 길이의 형태는 매우 다양했다. 가슴 바로 아래에 띠를 둘러 입거나 엉덩이 근처까지 한 번 더 둘러 입기도 했다. 5) 팔라(palla), 팔리움(pallium)은 외출할 때 입은 겉옷으로 투니카나 스톨라 위에 감아 입었고, 그리스의 하마티온에서 유래하였다. 여자가 입은 것은 ‘팔라’라고 했고, 남자가 입은 것을 ‘팔리움’이라고 했다. 6) 패눌라(paenula)는 토가 다음으로 모든 계층에서 착용한 커다란 케이프의 일종이다. 반원형의 천을 어깨에 둘러서 입었고 후드가 달려 여행할 때나 비가 올 때 사용하였다. 나중에 이름이 카술라(casula)로 바뀌었고 오늘날 그 자취가 ‘제의’에 남아 있다. 로마 시민과 관료들이 입던 의복들이 그리스도교에 유입되면서 종교 의복으로 발전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현재 전례복(장백의, 영대, 제의, 카파, 달마티카 등)의 바탕이 되었다. 사랑의 실천이 더 먼저임을 잊지 말자 사회의 계층을 서열화하고자 상징, 표지들을 쓰기 좋아하는 풍토에서는 이 모든 것이 자유스러웠던 것 같다. 이러한 인간적이고 전통적인 체계 속에 들어 있는 위험성인 서열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징과 표지가 거룩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라는 사실도 공존한다. 거기 더하여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첼레스티노 1세 교황(422-432년 재위)이 428년 7월 26일 갈리아 지역의 ‘비엔과 나르본 지방의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은 사제 복장 문제에 대한 당시의 사고방식과 성직자들이 입는 옷에 대해 다룬 최초의 교황 문서이다. 이 서간에서 교황은 성직자가 평신도와 잘 구별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옷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서, 복장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신심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통해서’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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