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그리스도교의 장례 그리스도교는 구세사를 완결하는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삶을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았음을 선포하는 계시종교이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부터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아감이며 운명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날(dies natalis)이라고 기도했다. 성경의 장례는 1일장, 매장하는 일은 선한 행위로 이해했다 장례와 관련한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은 죽은 이를 특별한 주의와 정성으로 묻었다. 집회서에서 “죽은 이에 대한 호의를 거두지 마라.”(7,33)라고 하였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선한 행위로 이해하였다(토빗 1,18; 2,3-7; 12,12 이하). 그리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에서 분리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상태로 표현되기도 한다(시편 88,6). 구약시대의 장례 예식 풍습은 대강 다음과 같다. 죽은 이의 눈을 감기고, 고인과 입맞춤하며 시신을 씻긴 뒤 기름을 바르고 아마로 싼 노끈으로 향기 나는 약초와 함께 시신을 묶는다. 시신을 안치하고 애도가를 시작하며 시신은 대부분 죽은 날에 관도 없이 들것 위에서 무덤으로 내려놓는다. 많은 경우 기름과 발삼을 섞어 향료로 사용했다. 묘지로 가는 길에서, 또 장례 때 애도가를 노래한다. 신약에서 죽음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을 지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뛰어넘는 자신의 능력, 곧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이미 지상의 삶에서 보여 주신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예수님의 부활 신앙에 대한 희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초대 교회는 유다인의 장례 풍습을 따랐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다수가 히브리인이었으므로 장례 예절도 히브리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다인들의 거주 지역에서 이방인의 지역까지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이방인들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먼저, 죽은 이의 눈을 감긴 다음 몸을 가지런히 하고 수의를 완전하게 입힌다. 그리고 죽은 이의 가족과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외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방법은 공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 또는 참회의 시기에 행하던 관습을 따랐다. 또한 죽은 이의 가족은 단식하기도 했고, 커다란 고통을 표시하고자 반복적으로 곡을 하였다. 그리고 죽은 이의 친지와 친척들은 빵과 잔을 가져와 상을 당한 가족을 위로하였다. 이를 통해 히브리인들의 장례 관습에서 중요한 요소는 슬픔의 표명과 위로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장례식에서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140년 무렵 교부 아리스티데스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장례식에서 슬픔과 비애감을 표시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상을 떠난 그 형제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장례의 형식과 찬가와 기도문 등을 유다이즘에서 빌렸으나 부활 신앙을 중심으로 한 파스카적 예식으로 발전시켰다. 로마인들의 관습을 발전시킨 노자성체와 성찬례 거행 초기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관할권에서 확장하였기에 자연스럽게 고대 로마의 장례 문화를 만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역사가요 문명 비평가인 토인비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는 임종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불러 모아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 관습은 임종자를 위한 초대 교회의 밤샘 기도를 연상시킨다. 로마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정리하였다. 먼저 눈을 감기고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른 뒤 수의를 입히고 입안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 이것이 임종 직전 성체를 노자성체의 전통으로 변화시켜 남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인들의 관습에서 죽은 이의 집에서부터 묘지까지의 장례 행렬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장례식을 일컫는 ‘Exsequiae’, ‘Prosegui’는 이 행렬을 “뒤따른다”는 뜻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로마 관습에 시신을 매장한 뒤 ‘Silicernium’이라고 하는 장례 뒤 음식 나눔이 있었다. 이 관습은 정해진 날, 곧 기일에 음복의 형태로 거행되었다. 그리스도교는 ‘Refrigerium’이라고 부르는 음복 관습으로 차용하였다. 죽은 이를 기념하는 기일 관습은 처음에 순교자들에게 적용되어 장엄한 성찬례와 함께 거행되었다가 뒤에 모든 죽은 이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이 관습이 위령 미사로 발전하게 되었고 2세기부터 봉헌되었다는 흔적을 아리스티데스 교부의 「호교론」과 외경인 ‘요한 행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세기 말 무렵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노도 매장한 날과 기일에 드리는 미사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9,12)에,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거행한 그의 모친 장례식에서 어머니를 묻은 뒤 이어 성찬례를 거행했다고 전한다. 장례 미사가 일반화된 것은 6-7세기 이후부터이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의 동반으로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부각하는 장례 예식 초대 교회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전해 주는 문헌들로서는 1세기 중엽에 형성된 이집트 트무이스(Thimuis)의 주교 세라피온의 기도서(Euchologion)와 작자 미상의 「사도 헌장」(Constitutiones Apostolorum) 제8권, 5세기 말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위-디오니시오의 작품으로 알려진 「교계」(De ecclesiastica hierarchia) 등이 있다. 위-디오니시오의 「교계」에 나오는 당시 교회의 장례 예식은 두 부분, 독서와 시편으로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중심 예식으로 구성되었다. 중심 예식은 대부제가 예비 신자들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간 낭독과 보편 지향 기도는 각각 죽은 이를 포함시킨 가운데 전례의 정점으로 이끈다. 이와 관련하여 집전자와 참석한 모든 사람이 행하는, 시신에 대한 입맞춤과 도유로 작별 예식을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집전자는 개회(영접과 감사기도)와 마찬가지로 장례 예식의 마침 부분에서 축복하고 이어서 시신을 매장하는 곳으로 공동체를 파견한다. 집전자는 주교이며 부활을 통한 죽음의 조명이라는 관점을 잃지 않고 참석한 공동체 구성원이 죽은 이와의 친교를 입맞춤으로 표시한다. 도유는 병자 도유가 아니라 세례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 파스카적 의미를 드러낸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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