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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6강 고대 근동 신화와 이스라엘의 영성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5 조회수1,048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6강 고대 근동 신화와 이스라엘의 영성

 

안녕하세요? 한님성서 연구소의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성호경 바치고 마지막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집에서 TV를 시청하시는 시청자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예, 평신도 신학자가 설명해 드리는 '구약성경과 신들'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강의로서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드디어 완성의 때가 왔습니다.

 

제가 언젠가부터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말을 잘 안 쓰고요. 완성의, completion. 완성이

되면 우리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염두에 둘 수 있는 것이죠. 완성의 때가 왔습니다.

 

오늘을 26회 강의의 마지막 마무리인 완성의 때이니 만큼 첫 회에 말씀드린 이야기를

시청자 여러분 벌써 6개월 전이라서 첫 회에 말씀드린 내용 많이 잊어먹으셨을 텐데,

그 얘기를 다시 상기하면서 고대의 이스라엘의 영성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고,

 

그 전에 과연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어떻게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가지고 조금 재미있게, 마지막 시간이니까 쉽게 여러분들 하고 참여 하

면서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첫 시간에 제 소개를 드렸습니다. 현재 한님성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고, 서강대

신학대학원과 종교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개론', '고대 근동

의 종교', '유다교', '히브리어'등을 제가 강의하고 있다고 말씀드렸고, 그리고 제가 평신

도 신학자인 만큼 왜 평신도 신학자인지, 왜 평신도가 신학 강의를 하게 되었는지 등 등

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아마 이 강의의 의의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이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은 책을 한 권 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과 신들'이라는

이 책을 냈기 때문인데 이 책이 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타는 마당에 이 책의 내용을 차근

차근히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해 가지고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저서: <구약성경과 신들 - 고대 근동의 신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 (2012, 한님성서연구소)은

고대 근동학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구약성경의 의미를 폭넓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제시

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음

 

첫 시간에 들으셨을 줄 알겠지만 제가 이걸 하면서  두 가지 큰 걱정을 했습니다.

하나는 학술상 내용은 얼마나 지루할까? 학술만 그래도, 공부라고 그래도 일단 졸음이

오고, 뭔가 이렇게 학술적으로 하는 강의다 그러면 안 가잖아요. 사람들이.

 

거기다가 학술상까지 탔다고 그러는데 하, 이거 참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제가 컨셉

으로 잡은 게 평신도들한테 같은 평신도로서 가장 쉽게 설명을 해 보겠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야, 뭐 저런 게 학술상을 다 받어." 할 정도로 ^^*~~~ 쉽게 설명을 한번 해 보겠

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좀 어렵게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다 넚게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요. 아마 제가 계속 연구를 계속하면서 교회

안에서 평신도 신학자로서 살아가고 싶으니까 뭔가 다음에 개선이 되면 다음에는 더욱

더 쉽고, 더욱 더 깊이 다가오는 강의를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원래 처음에는 조금 못

해도 봐 주시는 거니까 조금 봐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제가 TV 강의를 처음 하는 거라서 아, 이거 말 실수를 하면 어떻하지? 등 등

이런 것도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조금 제가 여유가 있게 됐어요. 첫 한 10번 정도 강의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 가지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이것만 줄줄줄 읽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겨서 담당 PD 분도 저한테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아주 큰 다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강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고요. 저는 그냥 제가 하던 일을 하고 앞으로 제가 쓰는 책을

여러분이 더 많이 접근할 수 있으면 좋으실 거 같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 가려고 합니다.

 

제가 첫 번 시간에 평신도 신학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잠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

다. 아직도 우리 교회에 낯선 이름입니다. 신학은 대부분 신부님들, 수녀님들이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신도 신학자를 아직까지는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교 300년 대를 왔고, 신사수 500만 명 시대를 맞는 이 시대에는 교회가

커지고 더욱 분화되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하시는 일도 많지만 그분들을 도와드려야 되는

우리 평신도인도 더욱 많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평신도 신학자자, 앞으로 저보다는 훌륭하신 분들이 공부를 하고

계시는 거 같애요. 그런 분들이 더욱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거 같고, 혹시나 지금 이 강의

를 보시는 젊은이나, 아니면 그런 젊은이를 둔 우리 신자 가정에서 자녀가 우리 교회에

대해서 좀 고민을 하고 그런다면, "아, 이런 길도 있더라." 하는 것도 이제는 알려 주시는

그런 계기가 이 강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 제목도 그랬지만 강의 제목도 보세요. 구약성경과 신들이죠? 이것도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이 제목을 처음 접하고, 책 낼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유일신을 믿는 사람

들이고 구약성경은 유일신교의 경전인데 왜 하필이면 구약성경과 신들이라고  하는가?

 

25회 강의를 지난 시간까지 다 들으신 분은 잘 아실 겁니다. 구약성경에는 신들의 이름과

표상이 수북히 나옵니다. 실제로. 그 당시는 그런 시대였어요. 하지만 그 신들을 믿으라는

뜻에서 쓴 것도 아니고, 그 신들을 전파하려고 쓴 것도 아니고, 하느님 오직 한 분이신 하

느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의 언어 속에 그런 게 붙어 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거

를 잘 구별해서 알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첫 시간에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왜 이 책을 썼는가?
저는 몇 년 전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

학과 성서의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왔는데 이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인테넷 상 이런 데서 좀 잘못된 정보가 많이 떠돌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은, 구약성경을 공격하는 소리들 인데요. 야휘는 그냥 부족신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부족의 신이다. 또는 야훼는 폭력의 신일 따름이다.

아주 전쟁의 신이다. 혹은 야훼신은 그냥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신이었고 고대

근동의 여러 잡신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심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은 고대

이집트나 바빌론의 종교를 베낀 짝퉁 종교다." 하는 것이죠.  

 

뭐 이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인터넷에 많이 떠들고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여기

에 대해서 조금 제대로 된 정보를 드려서 가톨릭 신자들한테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신들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 이유 그리고 그 신들의 이름이 왜 구약성경에 썼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현대 신학의 굉장히 발전된 정보를 드리면은 다행히 우리가 원래 정통

을 잘 말하면 사파들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린

것이고요.

 

학문적으로 정확한 정보 그리고 그거를 제대로 드려서 우릭 가톨릭 신앙을 수호 하는 일은

사실 이런 일에서는 평신도와 사제의 구분이 없는 것이죠. 우리 교회 전체의 사람들이 달려

들어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쓴 이유가 신앙을 수호하는 데서 올바른

믿음을 여러분이 찾는데서 ?교양으로 좀 도움이 되도록 하는 그런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대 근동의 무대, 얼마나 먼 세계이고, 얼마나 다양한 세계이고, 거기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렸어요. 그리고 우리와 많은 굉장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

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죠.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언어는 신화의 언어였다. 대량생산

사회가 나오기 전에, 로마 시대도 있기 전이예요. 그리스 철학아 생겨나기 전이거든요.

그 당시에 나왔던 문서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여섯 개의 신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날지 모르지만, 순서대로 꼽아

보면, 우리가 처음에 하늘신을 봤고요. 그 다음에 달신을 보았고, 그 다음에 바람신을 보았'

고, 그 다음에 강의신을 보았는데 살짝 이슬신도 우리가 곁다리로 책에는 없지만 봤습니다.

그리고 피의 신도 보았고, 나무신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나무신의 2부에서 가시라를 상징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죠.

 

* 하늘신 - 달신 - 바람신 - 강신(이슬신) - 피의신 - 나무신(가시)

 

그리고 중간 중간에 제가 특강을 넣었어요. 그래서 구약성경과 마르키온주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어떤 관계인가? 이걸 떼어서 볼려고 했던 어떤 이단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그 다음에 고대 근동 문자에 대해서 A라는 문자가

어떻게 알레프가 되었는가? 이런 것도 우리가 보았습니다.

 

뒤돌아보니까 여러분들이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하신 것이예요. 지금. 그러니까 나중에 혹시

라도 이것 재방송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한번 공부하는 의미에서 주욱 한번 둘려보시는 것

도, 책 보시면서 보시면 집에서 좋은 교양의 시간이 될 거 같애요.

 

제가 이 여섯 가지, 일곱 가지 신들을 전부 다 하나하나 되돌아 보지는 않을 거예요. 단지

탈신화 하고 재신화하는 것을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죠. 다시 한번, 신들의

이름을 썼다고 그래서 그 신들을 다 믿고, 그 신들을 전파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탈신화 했고 다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이거는 사실은 같은

신의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다른 의미에서 쓴 것이라는 것이죠.

 

하늘신도 그랬고, 달신도 그랬고 그랬어요. 이 탈신화와 재신화의 현장, 탈신화와 재신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어디인가? 이게 바로 창세기 1장이었어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

님이 말씀으로 무엇을 창조하시죠? 바로 해, 달, 땅 이런 걸 창조하세요. 이런 것들은 신이

아니예요. 창세기 1장은 이런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다 하는 것이죠. 신의 이름을 썼을지언정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라고 쓴 거예요.

 

*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그저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자신의 야훼 신앙에 맞춰 판단하고 선별해서 섭취, 소화하여 탈신화화해서 야훼

  신앙으로 소화했다.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라고 부를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고 해와 달, 하늘 등 모든 것들을 그저 피조물일 

  뿐이라는 '탈신화'와 '재신화'의 개념을 집대성한 본문이다

 

고대 근동의 신들이 또 굉장히 강력한 신들 하늘신, 달신 이것들도 아주 얄짤 없어요. 요즘

말로 하면. 다 그냥 하느님의 피조물인 거예요. 한 방에.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아, 이스라엘

은 굉장히 작은 나라였는데 굉장히 큰 믿음을 가졌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현신 세계에서는

별로 큰 힘을 쓰지 못했지만 이들이 믿음을 가지고 완전히 그 당시의 세계관을 뒤집어 버린

거잖아요.  믿음은 때로는 이렇게 굉장히 큰 용기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의 강력했던 큰 제국들은 지금은 다 없어져 버렸지마는 이스라엘은 그 믿음과

함께 살아남은 또 힘이 되었구나. 우리가 믿음, 구약성경을 보면서 또 그런 것들을 배울 수도

있다 하는 것이죠.  창세기 1장 나온 김에 마지막 시간이니까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

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독일 유학 중에 독일의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울 때 신부님 되실 분도 있고, 수녀님 되실

분도 있고, 그리고 평신도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 평신도들이 주로 신학을 배워서 어디에

취직을 하냐 하면, 고등학교 종교 교사로 취직을 해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초등학교.

 

독일은 북쪽은 개신교, 남쪽은 가톨릭이잖아요. 남쪽 가톨릭에서는 종교 교육을 지금도 잘

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 종교 교사로 취직을 해서 보통 종교 교육은 일주일에 몇 시간이

기 때문에 이 학생들이 이제 우리나라 말로 하면 국어 선생님이죠. 게르마니스트. 독일어

선생님을 하거나 하니면 다른 걸 하나 해서 취직을 해요. 그러면 거기서 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친구들 공부하는 건 저하고 교재가 달랐어요. 저는 박사 공부를 하느라고 공부

하는 거고, 이 친구들은 우리나라로 따지면은 교사 임용고시를 공부하는 거죠. 교사 임용고

시 시험 공부 하는 교재를 따로 공부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날 같이 친하게 지내는 카린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가가  지고,

그 친구와 되게 친해요. 여자 친구인데, 그애 남편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잘 지냈어요. 그

친구가 결혼할 때 신부측 증인을 제가 섰어요. ^^*~~~ 카린의 부모님도 저한테 굉장히 잘

해주셨는데, 착하신 분들이고 독일 남부에서 오래된 가톨릭 집안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친구한테 "야, 너 창세기 1장을 어떻게 가르치냐? 애들한테. 그 교재를 한번

보자." 그랫어요. 그때 한창 전 세계적으로 '창조학회'가 난리칠 때였어요. 뭐 창세기 1장이

과학적으로 다 증명이 된다. 막 이런 식으로.

 

우리가 고대 근동의 신화, 여러분 봐서 알겠지만 창세기를 쓴 사람들은 과학의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거든요. 신화의 언어를 쓴 거고, 이 신들이 피조물이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이다라고 해서 쓴 거지 지금 현대 과학의 뭐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고 뭐 단백질이 어떻게

합성되고 이런 거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런데 너네들 교재는 이거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한번 보자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교재를

보여줬는데 이 교재는 가톨릭만 쓰는 게 아니라 루터교, 개신교회도 같이 쓰는 교재였어요.

공동으로 가르치는. 창세기 1장을 같이 가르치는데 거기서 보고 제가 조금 놀랐어요.

 

21세기의 학생들, 지금의 독일 12~15세 되는 학생들을 세대가 다르지요. 완전히 세속화 된

학생들이고, 종교적인 색체가 굉장히 제일 적은 세대예요. 역사상. 그 학생들한테 과연 창세

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어떻게 가리치고 있을까? 제가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요.

이 책에 썼습니다. 그 교리서에서 창세기 1장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냐 하면요?

 

창조주를 찬미하는 가장 아름다운노리로 설명을 하더라고요. 과학적인 글이 아니라 창조주

를 찬미하는 노래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노래로 보면 운율이 딱 맞아요. "그리고 하루 밤

낮이 지났다. 보시니 참 좋았다." 이런 식으로 후렴구가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이게 과학적 증명의 글이 아니라 이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땅과 별과 하늘과

이게 너무 너무 좋아서. 제가 계속 설명을 드리지만 고대인들이 그 자연을 보고 느꼈던 그런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있지요. 그런 감수성으로 세상을 보니까 너무 좋아서 하느님을 찬미

하는 노래다. 

 

구약성경은 전부 다 하느님의 찬미가지만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찬미

하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야, 독일이면 참 이성과 관념

의 나라, 쿡 질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거 같지 않은 굉장히 그렇게 철두철미한,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철두철미한 사람들인데 이런 이성과 관념의 이론의 나라에서 세상 창조를 이성보다

우선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하는 교과서를 본 거예요.

 

아, 이것도 현대 신학의 흐름이구나. 우리가 지금 감성이 중요해지는 시대이고, 그 감정으로

마음으로 창세기 1장을 받아들여라라고 하는 말씀하고 비슷하게 다가왓어요. 그래서 제가

아, 창세기 1장이 어느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내지는 역사적으로 언제 나왔다 내지는 어떤

과학적 사실이 들어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것 자체가 엄청나게 하느님을 찬미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구나 하는 것을 한국 가서 알려주면 좋겠다 해서 이 책을 쓰게

된 모티브 중에 하나였어요.

 

여러분들도 창세기 1장을 읽어보실 때 증명의 눈, 논리의 눈 이렇게 보는 것도 중요하시만

마음으로 한번 받아들여 보세요. 창세기 1장은 하느님이 굉장히 좋은 이 우주를 만들어서

우리 인간을 주인공으로 앉혀 주신 그런 시 같은 텍스트예요. 그런 찬미가라는 것이죠.

 

이런 신학을 초대 교회의 마르 에프렘 같은 훌륭한 교부가 계신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여러

분들한테 다 설명은 못 드리겠고, 한님성서 연구소에서 마르 에르렘의 책에 대해서 나온 게

있어요. 관심 있는 분들은 그거를 보세요. 굉장히 훌륭한 고대의 교부신대 논리나 증명은

한 개도 안 하고, 하느님의 모든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시로 읊은 분이예요. 모든 창조, 하느님

이 하셨던 모든 일들을. 그래서 지금도 잘 읽히는 책이예요. 이 책에도 마르 에프렘을 제가

언급해 놨어요.

 

그래서 자,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대해서 일단 정보를 하나 드리고 원문은

어떻게 읽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릴께요. 제가 구약성경 특강 시간에 잠깐 얘기 했지만,

마르키온 주의는 마르키온이 나왔을 때 처음에 우리 구약성서라는 이름이 없었어요.

그때는 어떻게 했냐 하면, 구약성경은 유다인의 성경,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성경, 이렇게

불를 때예요. 신약, 구약이라는 말이 없이.

 

* 21세기까지 구약성경은 '유다인의 성경'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성경'으로 불렀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다가 점차점차 아, 이게 우리 하나의 계약이다. 구약의 하느님이나

신약의 예수님이 한분이시니까 이분이 옛날에 맺었던 계약과 새로 맺은 계약. 그래서 구약

과 신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점차 쓰게 되었는데 현대 신학자들이 이 이름에 대해 가지

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분들이 계세요.

 

구약 그러면 좋기도 하지만 낡은 거 아니냐? 하는 것이죠. 이 용어 자체가 요즘 마로 하면

공정하지 않다. 훼어하지 않다라고 학자들이. 그런 거 같기도 해요. 더 정확한 용어를 정착

시키려고 학자들이 노력을 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저도 이번에 새로 우리 교회에, 우리 교회에 보면은 주교회의에서 이렇게

용어를 정해 놓았잖아요. 이런 용어는 써도 되고 이런 용어는 가급적 쓰지 말자. 이렇게 해

놓으시는데 구교와 신교라는 말을 좀 피하자는 걸 봤어요. 왜냐하면 구교 그러면 신교가 나

와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 같애요. 우리나라 말이. 오래된 것은 좋은 것이지만 새

로운 것이 나오면 원래 사람들이 새 것을 더 선호하게 되죠.

 

그래서 구교와 신교라는 말을 쓰지 말고 가톨릭, 개신교 이런 말을 써야 한다. 하시더라고요.

이것도 아마 한국 사람이 지금 느끼는 새 것과 옛 것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분명히 옛날

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새 것을 훨씬 좋아하니까. 그래서 구약 그러면 낡은

계약, 그래서 이제는 효력이 없어진 계약처럼 사람들한테 들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은 낡은 약속이 아니예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첫째 계약이예요.

그렇지요? 그래서 구약성서라는 말을 쓰지 말고 '첫째 성서'라고 쓰자. 그래서 첫째 성서

니까 F?rist 하면 첫째니까 어떤 학자는 아, frist도 좋은데 영어의 Primary 그러면 훌륭한 맨

앞자리에 쓰는 거잖아요. 그래서 'Primary Testment'라고 하자.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 구약은 '낡은 약속'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류와 맺으신 '첫째 약속'이라는 뜻에서 구약

  성서를 '첫째 성서' 영어로는 'Primary Testament'로 쓰기로 한다

 

더 나아가서 독일의 아주 저명한 개신교 구약 학자인 오토 카이저 교수가 있어요. 구약성서

공부하는 분도 오토 카이저 이름만 들어도 아는데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 이분은 어느날부터

나는 이제 더 이상 구약성경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 그래서 인제 '첫째 성서 Erstieitung

Testament'라고 써요. 그리고 일부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하리숀' 히브리 말로 '첫째 성서'

이런 말을 써요.

 

그런데 구약성서를 첫째 성서라고  쓰면요. 신약성경은 뭐가 되요? '둘째 성서'가 되요.

그러니가 이것도 또 한 좋아요. 일종의 역차별이 되는 거죠. 'Second ? Testment'인데,

Second라는 말은 별로 이렇게 좋은 말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제 타협안을 내는 학자들도

있어요. 첫째 성서라고 쓰고, 신약은 그냥 신약이라고 쓰자. 좀 웃겨요. 이 말도.

 

* 구약성서는 '첫째 성서'로 신약성서는 '새 약속'의 뜻을 살려 그대로 '신약성서'로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어떤 학자는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구약성경은 유대교와 우리 그리스도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성서다. 그래서 '공동성서'다. Commun Bible'이라는 말을 써요. 예, '공동성서'

라고 쓰자.

 

이런 걸 다 여러분들한테 소개시켜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구약성경'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 용어를 찾자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혹시나 구약성경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

로 사용할 때 아, 신약성서가 있으니가 낡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까봐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예요. 지금 우리가 용어로 쓰고 있는 구약이나 신약이라는 이런 말을 바꿀 이유는 별로

없을 거 같애요.

 

그래서 그 용어를 쓰되 이 구약은 낡은, 그래서 없어진, 이제는 효력이 없는 그런 의미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첫재 맺은 계약, 하느님이 인류한테 제일 먼저 손을 내미셔서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권능을 제일 처음 보여주신 것이다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좋겠다. 이것도 역시 일종의 그리스도교 교양이라고 할 수 있죠.

구약은 낡은 뜻이 아니라고. 어디 가서 기회가 되면 시청자 여러분들도 말씀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애요.

 

성경의 본문을 읽는 느낌은 어떠한가? 이 히브리어는 많은 분들이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어떻게 전달해 드리면 좋을까 하는데 제가 나름대로 여러분들 하고 이런 걸

한번 말씀드리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일단 알아두실 거는 이런 게 있어요.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말을 많이 만들어요. 단어가

늘어나요. 옛날에는 없던 물건이 생기기도 하고요. 똑같은 행동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먼지는 저절로 쌓이는 거 잖아요. 말도 그래요. 말도 이렇게 저절로

어느 구석에 이렇게 많이 생기는 거 같애요. 인간의 때 같기도 해요. 시간이 지나면 때는

그냥 생기잖아요. 말도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요.

 

그래서 현대의 어휘는 고대어 어휘에 비해서 어휘 수가 많아요. 세밀히 분화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금 현대어는 더군다나 말이 더 빨리 늘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 분야 아니면 교수나

이런 분들도 다른 분야의 책을 못 읽어요.

 

여러분들이 다른 책을 읽으면 어려운 건 학자들이 책을 어렵게 써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언어를 잘 모르기 때문이예요. 같은 말이라고 그래도 경제 학자가 쓰는 말이 다르고, 철학

자가 쓰는 말이 다르고, 보통 사람들이 쓰는 말이 다 달라요. 그렇지요?

 

그런데 고대 언어는 저처럼 공부하잖아요? 히브리어나, 아카드어나, 아람어 이런 거 공부하

시면 좋은 점이 고대 언어는 이렇게 분화되기 전의 언어라서 어휘수가 적어요. 이거 아주 좋

아요. 성경이든, 논어도 마찬가지인데 어휘 수가 지금처럼 많지를 않아요. 적어도 컴퓨터,

전기 뭐 이런 단어는 하나도 없고요. 같은 행위를 표현하는 데도 어휘 수가 훨씬 적어요.

원초적인 언어예요.

 

그래서 하나의 언어가 현대적인 의미로 번역할 때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고, 저렇게도 번역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예를 들 게 '네페쉬'라는 말이 될 거예요. '네페쉬'라는 히브

리어 단어가 있어요. 이게 구약성경에 754번이나 나오는 굉장히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시편

에만 144번 나와요.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원래는 가장 원초적인 의미는 '목구멍'을 뜻했어요. 어떻게 나오냐 하

면, 하바쿡서 2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참으로 재물은 믿을 수 없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 수 없다. 저승처럼 묵구멍을 넓게 벌린 그자는 죽음과 같아 만족할 줄 모르고 ..."

저승처럼 목구멍을 벌린다 할 때 네페쉬를 벌린다. 이렇게 써요.

 

* 하바 2,5: 참으로 재물은 믿을 수 없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 수 없다.

   저승처럼 목구멍을(그의 네페쉬를) 넓게 벌린 그자는 죽음과 같아 만족할 줄 모르고 ...

 

그런데 네페쉬라는 단어는 목구멍의 뜻만이 아니라 언어가 분화한다고 그랬죠? 현대어로

적어도 7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을 해요. 똑같은 에페쉬를. 지금 목구멍이라는 뜻을 말씀드렸

죠? 자, 네페쉬로 목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목구멍이 아니라. 왜 목을 의미하겠어요? 목구멍

이 가까이 있으니까 목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요나서 2장 6절에 보면,

 

* 요나 2,6: 물이 저의 목까지 차오르고 심연이 저를 에워쌌으며 ...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했을 때, 네페쉬까지 차오른 거예요. 목구멍까지. 그때 물은 목구멍,

속에서부터 차서 목구멍에 찬 게 아니라 겉에 물이 차서 이 목까지 차 올랐다고 말할 때

물이 네페쉬까지 차오로고 이렇게 표현을 해요.

 

* 요나 2,6: 물이 저의 목까지(네페쉬까지) 차오르고 심연이 저를 에워쌌으며 ...

 

목구멍은 뭐가 지나다녀요? 음식이 지나가거나 숨이 지나다니죠. 그래서 네페쉬는 생명을

뜻하게 되요. 숨이 지나다니죠. 그래서 네페쉬는 생명을 뜻하게 되요. 예, 네페쉬란 말이

이나 목구멍이 아니라 생명을 뜻하게 되요. 여러분 피의신 할 때 배웠죠? 어떤 일이 있어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신명 12,23절을 보겠습니다.

 

* 신명 12,23: 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생명이고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피는 생명이다.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배우셨죠? 그런데 이거

를 히브리 말로 말씀드리면, 

 

* 신명 12,23: 그렇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피는 먹어서는 안 된다. 피는 생명이고(네페쉬이고)

  생명을(네페쉬를) 고기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네페쉬를 목구멍으로 번역하면 틀린 거예요. 그쵸? 여기서는 생명이라는 뜻이예요.

같은 단어가 그렇게 되는 거죠. 자, 여기서 네페쉬의 네 번째 의미가 발전을 해요. 생명을

뜻하게 되니까 생물 그 자체, 숨이 있는 것은 네페쉬로 그냥 부르게 되요. 목구멍으로 숨이

들고 나는 생물. 곧 동물을 지칭해요. 창세기 1장 24절에 이렇게 나오죠.

 

* 창세 1,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히브리 말로 말씀드리면,

 

* 창세1,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땅은 생물을(살아있는 네페쉬를)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살아있는 네페쉬, 이게 '네페쉬 하야' 거든요. 살아있는 네페쉬를 우리나라 말로 어떻게

번역을 하냐 하면 '생물'로 번역을 했어요. 살아있는 숨이라는 뜻이죠. 사람도 목구멍에

숨이 있어요. 그래서 네페쉬란 말로 사람을 뜻하기도 해요. 어떤 때는. 야곱에서 태어난 자식

들로 라헬의 자손이 있는데 창세 46장 22절에 보면,

 

* 창세 46,22: 이들은 야곱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로 라헬의 자손들이다. 이들은 모두

  열네 명이다.

 

창세 46,22에도 나오고, 15절, 25절, 27절에도 열네 명이라고 나오는데 이때 히브리 말로

어떻게 돼 있냐 하면,

 

* 창세 46,22: 아들은 야곱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로 라헬의 자손들이다. 아들은

  모두(모든 네페쉬는) 열네 명이다.

 

모든 생물은, 거기서 나온 생명체는 여기서는 사람이예요. 여기서 동물로 하면 큰일나요.

사람이예요.^^*~~~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을 해요. 추상적인 뜻으로 발전해서 한 사람의

내면. 사람은 인격이 있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인격을 뜻하는

단어로 네페쉬가 나와요. 인격이라는 뜻이 되요. 아까 목구멍이 있는데, 목에서, 숨에서,

생명에서, 생물에서, 사람에서, 그 다음에 이제 인격으로 가는 거예요. 민수 30, 5을 보면,

 

* 민수 30,5: 그의 아버지가 딸의 서원이나 딸이 스스로 한 서약을 듣고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의 모든 서원은 그대로 성립되고, 그가 한 모든 서약도 그대로 성립된다.

 

예전에는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었어요. 옛날에 이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특히 딸은 아버

지의 소유물이었어요. 그러니까 딸이 누구한테 맹세를 할 때 서원을 한다면 그 아버지가 듣

고 있다가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딸의 서원이 된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

리 말로 '그가 스스로', '그녀가 스스로'라고 했지만 그냥 네페쉬예요. 여기서 네페쉬의 마지

막 뜻, 영혼을 뜻하게 되요.

 

* 민수 30,5: 그의 아버지가 딸의 서원이나 딸이 스스로(그녀의 네페쉬로) 한 서약을 듣고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의 모든 서원은 그대로 성립되고, 그가 스스로(그녀의

  네페쉬로) 한 모든  서약도 그대로 성립된다.

 

그래서 아가서 1장 7절에 보면 아가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죠.

 

* 아가 1,7: 내 영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일러 주세요. 나의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일러 주오.

 

여기에 히브리 말은 어떻게 돼 있냐 하면, "내 영이(내 네페쉬가) 사랑하는 이여, 내게

일러 주세요. 나의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일러 주오. 이 뜻이죠.

 

하나의 단어가 이렇게 7개로 번역을 할 수 있으니까 히브리어 시간에는 에페쉬를 여기서는

어떤 뜻이냐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잘못 번역하면 완전히 오역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현대어 성경은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옮겼어요. 반면에 히브리어 원문은 직관적이고

상징적이예요.

 

 * 현대어 성경은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옮겼지만 고대 히브리어 원문은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면이 뚜렷하다

 

여기서 성경 히브리어의 두 번째 특징을 여러분들한테 알려드릴 수 있어요. 이에 네페쉬

라고 딱 하지 않고 영혼이다, 생명이다 하는 걸 딱 정해지지만 성경이 주는 직관적인 언어

아, 이게 네페쉬지만 사실은 목구멍이라는 뜻이야. 마치 한문 번역을 해 놓으면 지금 읽기

는 쉽죠. 하지만 원래가 한문 원문이 주는 뜻이 있잖아요. 그거는 이거하고 비슷해요. 직관

적인 통찰.

 

그래서 성경 히브리어를 보고 있으면 아, 이게 경전의 의미를 전달하는 참 좋은 말이라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원문을 읽는 것을 이제 현대어로 읽으면은 원문으로 읽는 맛을 쫓아올

수가 없어요. 또한 함의가 있어요. 풍부한 의미가 있는데 네페쉬를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단어 안에 다양한 의미가 여러 개가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과연 현대어로 어떤

단어가 적합할지 늘 결정을 해야 되요. 더군다나 지금 우리의 시대는 말이 빨리빨리 변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30년 전에 번역하던 것이 지금에 통용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새로 또 고쳐

야 되는 것이죠. 이렇게 현대어로 번역을 해 놓으면 우리가 읽기는 말씀드렸듯이 풍부한 함

의가 실종될 수밖에 없어요. 네페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을 싹 빼 버리고 생물, 영혼,

이렇게 딱딱 정해 주니까. 인격이라고 정해주니까. 생명으로 옮기든, 사람으로 옮기든, 영혼

으로 옮기든 네페쉬가 지닌 풍부한 의미의 세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현대어는 없어요.

 

그러므로 원문의 함의를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의 그

미, 그 언어를 여러분이 직접 공부하는 게 가장 좋고요. 신잗르의 교양으로 조금 능력이 있는

신자들은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게 우리 교회의 어떤 문화로 정착이 되면 좋을 거 같야요.

 

이상하게 절에 가면 불경을 원문으로 읽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성당에 오면은

히브리어 성서를 원문으로 읽는 분은 별로 없어요. 그것도 아마 우리나라가 이직까지는 뿌

리가 얕아서 그런데 이것도 역시 뿌리는 좀 더 미래를 보고 내려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그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대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수천 년 동안 변화한 언어예요.

그래서 원래 맨 처음의 히브리어는 우가릿어나 가나안어 하고 비슷한 언어였는데, 이게

점차 지나면서 아카드어 하고 이집트어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리고 훗날 아람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나중에 히브리어 쓰는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쓰게 되요.

 

그래서 히브리어 변천사에 따라서, 저 같이 이제 전공을 하면 이 당시 히브리어는 아람어의

흔적이 보이니까 적어도 몇 세기 이후의 히브리어다 하는 게 눈에 보여요. 거기까지 히브리

어를 읽어주시면 아주 좋아요. 거기까지 공부하면 좋고요.

 

그래서 히브리어를 공부하는데 또 하나의 방법은 친족들을 연구하는 거예요. 히브리어 하고

가까운 나라 말들. 그러니까 이제 성서 언어학을 하게 되면 히브리어만 하는 게 아니라 히브

리어 주변 말들도 하게 되요. 대충 해서 10개 정도만 하시면 되요. 그런데 하실 수 있어요.

왜냐하면 단어가 적어요. 그리고 좀 비슷해요. 그래서 제가 히브리어와 가장 비슷한 언어라

는 우가릿어 문법서를 낸 적이 있는데 잠깐만 소개시켜 드릴 거예요. 마지막 시간이니까.

 

원래 우가릿어는 전 세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되게 적어요. 그런데 독일의 요제프 트롭퍼라

는 학자가 베를린에서 정말 초인적인 이를 해 냈는데 천 쪽짜리 연구서를 만들었어요. 문법

서로만 그 쐐기 문자를 넣어 가지고. 정말 좋은 책이예요. 전 세계 학자들이 모두 어, 이거

정말 좋은 책이다.

 

그런데 천 쪽짜리 우가릿티셔 그란마틱이라고 독일말로 나왔는데 빈칸도 되게 없어요.

천 쪽 빽빽하게. 문제는 천 쪽짜리 책을 가지고 어떻게 공부를 해요. 그러니까 트롭퍼가

대중용 교재로 한 200쪽 정도 되는 작은 책을 만들었고, 제가 그걸 한국말로 번역을 했어요.

그래서 나왔어요. 사전도 하나 번역했어요.

 

그런데 이거는 번역 일화인데 번역할 때 보니까 책에 오타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트롭퍼한

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한테 이메일을 보냈어요. 내가 보니까 당신 책에 오타가 있는

거 같다. 그런데 답장이 안 와요. 몇 번 보내니까 그때서 왔어요. 오타 맞다고. 그런데 몇 개

더 잡았어요. 그래서 트롭퍼가 그 다음부터 저랑 되게 친해졌어요. 오타를 잡아 줘서 고맙다.

그리고 한국어 판에서도 이런 것도 고쳤으면 좋겠다. 그래서 독일어 판보다 한국어 판이 지

금은 더 정확해요. 진짜예요. 트롭퍼가 인정한 거예요. 그 책 원문 보시면 나와 있어요.

 

그리고 각주도 다시 넣고 해서 각주가 독일어 번역본에 비해서 50개 정도 늘었어요. 이 책은.

그래서 저자하고 합의를 한 게 트롭퍼한테 제가, 이 책은 그냥 번역이 아니다. 개역이다. 내

가 많이 손을 댔다. 그래서 트롭퍼도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겠다. 그래서 독일말로 번역 그

러면 Uberseten인데 번역이 아니라 개역, 그러니까 번역하고 서로 손을 댔다. 그래서 개역

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 책이 두 권이 한님성서 연구소에서 나왔는데요.

 

* 한님성서 연구소 바로가기 :http://www.biblicum.or.kr/sub3_3.htm

 

이따가 마지막에서 말씀드릴테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분들이 있어

요. 우리 교회에. 이게 신학의 발전인데 평신도들이 이거에 좀 관심을 가져 주시고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거든요. 본격적인 신학을. 그런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말씀

드리고 마지막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되는데,

 

고대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에서 수많은 표상들을 따라 가지고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많은 도움이 되는 걸 가져와서 이렇게 일을 했어요. 그래서 많은 종류의 책을 남겼

는데 그렇다면 ?이런 논리를 펼 때 꼭 나오느 질문이 있어요. 뭐냐하면 고대 이스라엘의 원래

고유성은 없는거냐? 고대 이스라엘은 그저 이집트에서 한 구절 따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한

구절 따고 이렇게 해 가지고 다 섞어 놓은 거냐?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남는가 하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종교에 이웃 종교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그거는 어쩔

수 없어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만 년 약소국인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영향

을 주기보다는 영향을 받는 쪽이예요. 그리고 많은 종교적인 상징들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에 뿌리를 박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역사적인 fact만 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성은 없는 거

같애요. 진짜로. 구약성경의 어떤 구절도 벌써 그 이전에 1000년이 훨씬 넘는 큰 제국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찾아와도 찾아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의

거의 모든 외적 요소에 대해서 우리는 고대 근동에서 기원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고, 자존심 상할 필요가 없어요. 이게 바로

핵심 같애요.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에.

 

우리가 외적으로 어떤 팩트적인 면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로는 고유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찾아내는 건 어떤 외적인 요소, 예를 들어서 고대 이스라엘의 것이다

이런게 아니예요. 분명히 고대 이스라엘에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태도가

있어요. 어떤 믿음이 있어요. 우리는 그거를 봐야 되요.

 

우리는 흔히 그것을 유일신 신앙이라고 불러요.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큰 제국의 문물을

배웠고, 그들의 종교적 상징을 차용했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종교를 무작정 받들고 마음

으로부터 믿지 않았어요. 자신들의 신앙으로, 자신들의 독특한 야훼 체험으로 새롭게 해

석하는 성찰의 기준이 있었어요. 이러한 독특한 태도를 뭐라고 그럴까? 저는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 같애요. 우리가 배워야 될 점이 바로 그것 같애요.

 

*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의 특징은 한분만을 경외하고 그분께만 몸과 마음을 바치는 굳건한

  태도, 곧 유일신 신앙에 있다. 그들의 종교는 무작정 받들고 마음으로부터 믿지 않았다

 

영성은 삶의 태도예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죠.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의 특징은 뭐냐

면은 한분만을 섬기는 거예요. 한분한테만 마음을 두는 거예요. 신명기 6장 4절에 있죠.

마음과 몸과 영혼을 오직 한분한테만 두는 것. 길을 가든지, 집안에 있든지, 침대에 누워

있든지, 깨어 있든지, 잠자고 있든지 오직 한분한테만 마음을 두는 것.

 

그거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알고 있던 언어로 수많은 것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

해요. 그런 의미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성이란 어쩌면 빈 것일 수도 있어요. 예수님의

케노시스처럼 자기 비움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빈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뭘로 꽉

차 있어요. 뭘로 차 있냐 하면 역시 한분을 향하는 태도, 굉장히 크신 분을 향하는 태도로

꽉 차 있어요. 믿음으로 꽉 차 있는 거죠.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은 그런 거 같애요.

 

크게 비어 있기 때문에 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요. 동시에 한분을 향하는 마음

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을 새롭게 소화하고 새롭게 재창조할 수 있어요. 가시에

찔리면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 앞에 드실 거예요. 저는 이런 의미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

이 아닐까 하고 이 책에서 제시해 봤어요.

 

그래서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기원했다라는 것을 감출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가 인정하고 "어, 그래 그거를 사실이다. 그렇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지 않냐? 이 조그만 나라가, 별 것도 없는 나라가 이렇게 큰 믿음을 드러 낸

에서 우리가 정말 하느님, 예수님의 신비를 우리가 좀 느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을 해야

되는 거죠. 신자들의 교양이 어쩌면 거기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고대 근동학은 구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고요. 구약

성경은 내가 나를 빈 상태에서 하느님 한분을 향해서 택하는 어떤 태도, 개인이 아니라 집

단이 혹은 개인이. 그런 면에서 구약성경은 혹자가 말하듯이 배타성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

라 종교간의 어떤 대화를 촉진하는 책이 될 수도 있어요.

 

사실 이런 신학은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도 일치해요. 2012년 신앙의 해가 시작

될 때 계기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이 제2차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이었어요. 제2차바티

칸 공의회의 중요한 문서인 계시헌장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 성경 해석자는 성경

저술가가 제한된 범위 안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조건 하에서 당시에 사용하던 문체의 종류

를 이용해 표현하려 했고, 또 사실 표현한 뜻을 알아야 한다."  ㅡ 계시헌장 12항 중에서ㅡ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를 써서, 육화의 신비죠. 내려 오셔서 말씀하셨

어요. 인간의 언어로.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그 한계를 잘 봐야 되요.

그리고 인간의 언어가 지닌 그 한계말 보지 않고 그 인간의 언어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신비

영원한 진리를 알야야 되요. 그런면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를 알아야 되고 그 신화를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한 5분의 시간 동안 저희 한님성서 연구소에 대해서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려

고 하는데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하면은 성경이예요. 구약성경

과 신약성경이고요. 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나호는 시대에 여러분들이 이 강의를 통해서

아시겠지만 수많은 문헌들이 나왔어요.

 

그 이전에 나온 길가메쉬 서사시나 이런 문헌도 있고, 동시에 나온 문헌도 있고, 아니면은

교부들의 문헌도 있어요.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도 있고. 그런데 그 많은 문헌들은 성경과

먼저 나왔든 뒤에 나왔든 성경을 아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서들이예요.

 

영어나 불어나 혹은 최소한 일어로도 많이 번역이 돼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게 번역이

돼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저희 한님성서 연구소에서 우리 가톨릭 학자들, 평신도 학자들이

모여서 이런 것을 하나하나 번역을 하고 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마르 에프렘이라는 교부는 시리아어로 썼어요. 고대 시리아어로.

꼬불꼬불한 이상한 문자 있어요. 그거를 이수민 박사가 번역을 해서 많은 작업을 하고

계시고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던 송혜경 박사는 또 외경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고 또 저는

고대 근동의 아카드어라든지 우가릿어 같은 거 연구하고 있거든요.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우리말로 번역을 해서 우리나라 신학을 살찌우는 일을 해야 되요.

이게 굉장히 우리 교회에는 낯선 일이고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은 "야, 그거는 저기 유럽의

신학자나 저기 미국의 신학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잖아."?라고 하지

만 아니예요. 그러를 우리말로,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은 어쩌면 우리 밖에 할 수 없어요.

이 시대에서.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연구소가 있다는 거를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고, 관심을

촉구하고 싶어요. 원문 연구는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고 우리 신앙에 아주 근본을 다지는

작업이기도 하고, 원문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역시 우리 한국말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도 되

는 거죠. 선교 300년대, 신자수 500만 명의 시대에 걸맞는 전문 연구소가 저희 말고도 이제

하나하나 생겨날 것이라고 믿고요. 생겨나야 할 것 같애요.

 

이런 연구소들이 우리 신앙의 맥을 충실히 잇고 또 교회의 유구한 믿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

고 수호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신자들도 한 단계 엎그레이드 된 눈을 가지

고 그런 연구소를 쳐다봐 주시면 대단히 고마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긴 강의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요. 평신도 신학자에게 좋은 기회를 주신 평화

방송 측에 그리고 지금까지 26회 강의를 잘 들어주신 여러분과 집안에 계시는 우리 시청자

분들한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 우리 좋으신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

분 댁에 영육간에 평화를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번 강의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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