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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24강 예수님 부활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05 조회수989 추천수1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4강 예수님의 부활

 

■ 오늘 이야기 .../ 진정한 부활 체험

 

여러분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활이라고 그래 가지고 죽었

다가 뭐 다시 살아난다든지, 불사조처럼 죽지 않고 천 년 만 년 산다든지 그런 것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부활이 뭔가 이렇게 물으면은 대답하기가 수

월한 것은 아닌 것 같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가장 핵심이

라고 이야기하는 이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도 불가능해

는 것 아닌가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 부활 사건을 보고 우리 좀 지혜를 모아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영신수련 마지막 주간인 부활 주간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저희들

신앙에 있어서의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활 신앙에 대해서 깊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부활의 참된 의미를 저희들 일상의 삶과 제대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단순한 기복 신앙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여 주시고 저희들 인간 존

재의 깊이에 대한 이해를 부활 사건을 통해서 알아듣고 체험하며 실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영신수련 흐름 안에서 넷째주간의 위치
    - 긍정의 길을 통한 사랑의 절정 체험

2. 기도하는 방법
    - 스스로에게 부활체험이 일어나야! : 토마스 사도의 태도
    - 성모님께 발현하신 모습, 베드로 사도에게 발현하신 모습 등
    - 빈 무덤 안에서 머묾 : 죽음조차도 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차원의 붕괴,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

3. 부활사건의 양태
    - 사랑받고 있다는, 여릿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체험과 그를 통한 생명의 힘
    -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부활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온갖 의문들
    -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인 내지 채널 : 복음관상기도의 중요성
    - 위로의 사도직

4. 부활사건의 신비의 깊이
    - 세상을 보는 눈의 온전한 변환 : 통합적 관점의 숙성 (이원론적 분리에서 오는

       아픔을 통해 이중성적 통합에서 오는 기쁨과 생명을 맛봄)
    -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 성령의 활동

5. 피정 중의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예, 우리 이제 지난 주간에 수난에 대해서 봤었죠.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이제 넷째 주간.

넷째 주간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관상하는 주간인 거예요.

 

# 넷째 주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관상

 

전에도 처음에 그런 말씀드렸지마는 영신수련에서 이렇게 주간하는 이야기는 달력상의

7일, 1주간, 2주간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랬죠.

 

# 영신수련에서 말하는 주간은 날짜 개념이 아닌, 영의 큰 흐름을 구분한 것

 

영신수련 전체에서 역동적인 흐름이 있는데 그 큰 흐름들을 성경을 묶어서 한 주간, 한 주

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수난, 이제 부활인 거예요. 이제 끝으로 우리가 남겨 놓고

있는 것은 이 성령 강림, 승천과 성령 강림 그리고 사랑을 느끼기 위한 관상, 이 기도를 마

지막으로 해서 피정 전체가 마무리가 되겠죠.

 

그런데 이 넷째 주간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 지난 주간에 수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도 얼핏 비추기는 했지마는 이제는 수난까지도 지나고 부활이 오면은 더더욱 더 확실한 하

산할 채비를 차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첫째 주간 그 어려운 고비도 넘겼고, 둘째 주간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 신나게 재미있게 놀다가 셋째 주간에 와서 이제 잠시 예수님의 아픔

에 동참하면서 눈물 좀 흘리다가 아, 이제는 자매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러면서 이제 하산할 채비 떡 하고.

 

한 달 피정하고 있으면은 넷째 주간쯤 들어오면은 이미 한 25일쯤 지나고 있죠. 그래서 이

제 한 5일 정도 남는 거예요. 이때가 되면은 피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위로와 힘도 많이 얻

기는 하지마는 나름대로 지치고 어려운 것들도 있죠. 그러다 보니까 이제 부활에 들어오면

서 그저 이제 알렐루야 부를 생각부터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뭐 짐정리도 하고 이제 피정 끝나면 돌아가서 뭘 할까? 그런 생각들 막 하고

있고. 진짜 보따리 싸고 이제 집에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 이렇게 되면은 정말 한 달

피정 망치는 수가 생기죠. 부활에 대한 이 관상이 수난도 대단히 중요했지마는 부활 관상

도 그에 못지 않게 너무나 중요하다.

 

수난 관상할 때 여러분들이 기도할려고 들어가면서 곡소리부터 낼려고 하지 마라. 그저 울

고 슬퍼할려고, 고통에 잠길려고만 하지 마라 했던 것처럼 부활 관상에서는 알렐루야부터

부를 생각 하지마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제는 그 부활 사건을 기도하는 거니까

무조건 기뻐 용약(勇躍)해야 된다.

 

# 부활 관상에서 단순히 기쁨만을 보려하지 않도록

 

아, 자매님, 축하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거 좀 경계해야 될 모습

이죠. 그런 식으로 함부로 기쁨과 무슨 환희, 생명 이런데 막 빠져드는 것. 그것이 역시 틀

렸다든지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은총을 누리고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바람직함

에도 불구하고 어거지로 그런 것을 막 쥐어 짜낼려고 하다 보면은 머리로 기도해 버리기 십

상인 거예요.

 

그리고 심리 차원에서 최면 걸어가지고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맛볼려고 하는. 그러다 보면

은 그런 기도는 하루 이틀 지나면은 그 기도의 효험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들이 전부 빠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기도핮는 것 아니다. 역시 수난 관상 때와 마찬가지로

부활 관상 때도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채워주시는 것.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알아듣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거예요.

 

# 지식이나 심리차원의 기도가 아닌,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부활 관상에 있어서 함부로 알렐루야부터 부르지 마라 하는 것하고 관련지어서 우리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곧잘 토마스 사도를 이야기를

할 때는 불신의 사도 뭐 이런 이야기를 하죠.

 

# 토마스 사도의 부활체험(신약성경 요한 복음서 20장 24-29절)

 

자기가 없을 때 열 제자들만 있을 때 예수님께서 한 번 발현하셨죠. 그래 가지고는 토마스

사제가 나중에 오자 제자들이 와! 우리는 예수님을 뵈었다고, 그래서 막 기뻐 좋아하고 날

뛰는데 토마스 사도는 난 믿을 수가 없다고. 예수님 손자국에도 손을 넣어보고, 옆구리에도

손을 넣어보고, 상처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봐야 그래야 비로소 믿겠다. 이러거든요.

그러자 이걸 가지고는 불신의 사도 토마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는 좀 피상적

인 견해인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토마스 사도가 얼마만큼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된다

하는 거예요. 딴 사람들이 전부 막 기뻐 날뛰고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서

부활 사건이 안 일어나는, 내가 부활 체험이 안 되고 있으면은 다른 사람들한테 일어나고

있는 그 부활 사건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슨 이기적인 욕심에서 그렇게

하지는 것이 아닌 거예요.

 

# 스스로에게 부활 체험이 일어나야 한다

 

사랑의 체험 부활체험 이거는 대단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고유한 체험들인 거예요.

내가 체험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체험하지 않고 딴 사람들이 막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와! 그래 부활이 좋다고, 좋아한다고 그래 가지고는 배가 부르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그래서  딴 사람들이 갈비를 뜯고 맛있게 먹고 있다고

한들 구경하고 있는 내가 내 뱃속이 불러지겠느냐?

 

컵 라면이러도 끓여서 내 뱃속에 넣을 때 그게 내한테는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

아닌가? 부활 사건의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인 거예요. 예수님, 그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시고

보시고 그래서 토마스 사도가 와 있는 그 자리에 다시 한번 더 발현하시는 것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서 토마스 사도야, 너는 봐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행복하다. 그

러신다 이래 가지고 그 봐라, 역시 안 보니까 못 믿겠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 아니냐

이래 알아들으면은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마는 좀 피상적이다 보이는 거예요.

 

그것보다는 부활 체험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은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느님

과 나와의 직접적인 만남, 도그마 상에서, 신학적 이론상에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하느

님은 이런 분이고, 부활하셨고 그런 것 백날 외우고 알고 있어봐야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내 체험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신앙이고, 중요하고, 의미 있다 하는 것 아닌가?

 

# 토마스 사도에게 다시 한번 발현하시다 

          -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 안에서 만나는 부활로 이끄심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다시 발현하셔서 그래, 과연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신앙의

어떤 첫발이라고 그럴까, 기초라고 그럴까 이것이 어느 자리에 놓여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다지신 다음에 그런 토마스 사도 그정도의 준비가 딱 되어 있는 사람을 한 차원

더 높게 끄집어 올리는 것. 그 선상에서 이제는 보고, 듣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체험들이

일어나는 그런 경지에까지 가야된다. 이러면서 이끌고 계시는 것이지 믿음이 약하다고 꾸

짖고 계시는 것으로 알아들으면은 좀 곤란한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활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거기에 자족하고 있어 가지고

는 신앙이 대단히 허약해질 것이다. 그래서 내 체험이 그만큼 중요해진다. 이래서 내 안에

서 부활 체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알렐루야를 부를 재간이 없는 거예요. 내 안에서 부활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기뻐하고, 생명을 얻고, 위로를 받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쩌면은 수난을 겪고 있을 때 그 어떤 탁 가라앉은 분위리가 그럴까, 어려움 이런

것들이 부활 주간에도 그냥 그대로 마치 겉보기에는 수난의 분위기 같은 것이 그대로 이어

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 해 가지고 그게 부활 기도를 잘못하고 있느

냐 하고 알아들으면은 아니다 하는 거예요. 정상이다 하는 거예요.

 

내 안에 부활 체험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토마스 사도의 그 열정, 내가 직접 보고,

만져보고 내 체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는 그냥 여기에서 됐다 하고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면서 간절한 열망 속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 부활 체험에 대한 열망과 기다림이 필요

 

그 기다림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면서 부활 사건을 일으키시는 거죠. 우리 안에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 실질적으로 그럼 기도를 하는 거는 역시 예수님

부활 사건을 가지고 기도를 할 때 부활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좀 머문다

이랬었죠. 지난 주에 얘기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은데 한 가지 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

게 무덤 다음에 어느 부분을 보느냐 하면은 성모님과 제자들이 모여서 하룻밤을 보내고

계시는 이 장면을 보는 거예요.

 

#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머물기

 

이거는 진짜 마치 세 여인이 날이 새자마자 서둘러서 향유랑 들고 뛰어가죠. 그런데 무덤

에 갔는데 앞에 돌이 치워져 있고 그러고는 들어가서 보니까 무덤이 텅 비었고, 예수님 시

신이 없는 거예요. 그 빈 무덤 속에 들어가서. 이것이 사실은 부활 사건이죠. 부활 사건은

어느 누구도 본 사람은 없죠.

 

우리가 보통 그냥 부활 사건, 부활 체험 이러는 거는 그 다음에 발현 하신 것. 예수님이 발

현하셔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이런 장면들인 것이지 실질적으로 부활 자체가 일

어난 그 사건은 이 빈 무덤 여기에서 이제 이렇게 일어난 건대 이 안에 들어가서 물끄러미

좀 앉아 있으면서 뭐가 느껴져오는지를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빈 무덤 여기도 또 하, 뭐 예수님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 왜 빈 무덤일까? 왜

예수님 얼굴이랑 감쌌던 이런 천은 잘 개켜져 있을까? 뭐 그런 것들을 열심히 묵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빈 무덤 이 신비 속에 들어가서 좀 잠겨 있는 것. 그러면은 성령께

서 우리를 신비에로 이끄시면서 직관을 통해서 뭔가를 좀 보여주실지 모른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빈 무덤 이것이 참 중요하다고 보여지는 게 비어있다 하는 것. '빔' 하는 이것. 여기

에 보면은 이 세 여인이 와서 보죠. 그런데 예수님 안 계신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 없죠.

예수님의 이 부활 사건하는 이것 조차도 유(有)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죠. 아, 시신이

없네. 아, 그럼 부활하신 건가? 뭐 이런 식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젖어있는. 그저 있다 하는 '있음' 하는 그런 관점에서만 상대적인 지평

에서 있다. 없다. 이런 관점에서 쭉 보고 있는데 이 유(有)에서 그다음에 이 부활 사건 하는

것. 혹은 부활 체험들, 이 부활 사건으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 역활을 하는 것이 이 빈무덤

인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빈 무덤은 육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고리

 

이 빈 무덤을 통해서 상대적인 지평으로부터 절대적인 지평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여기에

서 '빔'하는 거는 없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있다. 사람이 없다 하는 그런 상태의 빔. 없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의 빈 무덤 하는 거는 有와 無를 통합한 전부다 있다고도 이야

기할 수 있고, 없다고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래 이거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없는 그런 빈 무덤이다. 이 차원보다는 영성적으로 더욱

더 깊게 볼 때는 상대적인 지평에서 유무를 따지고 있는. 그 세 여인들 그 모습에서 이제

진짜 새로운 각도에서 모든 존재자들을 이해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에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그 차원으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 역활을 하는 것이 이 '빔'하는 사건. 빈

무덤의 사건인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 아닌가.

 

부활 사건. 여러분들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제일 먼저 발현하셨는

가? 누구한테 제일 먼저 발현하셨어요? 막달라 마리아. 주로 이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영신 수련 책에 보면은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넷째 주간, 부활 주간에 들어

갔을 때 첫 번째 관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성모님께 발현한 장면을 관상하라. 이렇게 이야

기하는 거예요. 과연 맞다 싶죠.

 

성경에는 당연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발현한 것처럼 묘사가 돼 있죠. 그러면 무

슨 근거로 성모님한테 발현했다고 이야기를 하느냐? 이냐시오 성인께 그렇게 묻는다면은

이냐시오 성인은 그러시는 거예요.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건도 엄청 많이 있다. 그렇

죠. 성모님 만큼 예수님을 잘 알고, 많이 사랑하신 분이 있을까? 없죠. 그러면은 가장 먼

성모님께 발현하셨을 것이다. 대단히 합리적인 이야기라고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성모님께 발현하신 장면을 제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베드로 사도

한테 발현하시고, 베드로 사도한테 발현하신 것도 따로 무슨 구체적인 어떤 사건 같은 거

는 없죠. 그럼에도 불궇고 이 바오로 사도께서 언급하시는 서간에서 나오는 장면들을 보

며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뭐 베드로 사도에게도 나타나시고, 야고보 사도에게도 나타

나시고, 그다음에 뭐 몇 백명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시고 이런 이야기들 하시죠.

 

베드로 사도에게도 따로 발현하셨을 것 아닌가? 그렇게 믿어도 되겠다 싶죠. 어쨌거나

그런 구체적인 이제 성모님, 베드로 사도, 그다음에 뭐 열 제자, 열한 제자, 그다음에 막

달라 마리아, 뭐 세 여인들, 그다음에 티베리아 호숫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여러 장

면들이 있죠. 그런 것들을 관상해 가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제 부활 주간을 기도를 해

나가는데 이 부활 주간의 기도도 역시 대단히 수동적인 기도여야 한다 하는 거예요.

 

# 넷째 주간의 기도도 수동적으로

 

뭘 이렇게 왜 그럴까? 이런 식으로 막 묵상을 하고, 따지고, 알아듣고, 이 사건과 저 사건

은 모순되는 것 아닌가? 혹은 이 복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저 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것들을 막 따지고 앉아 가지고는 곤란하

다 싶은 거예요. 그저 그 부활 사건 자체를 어쨌근 일어난 사건 그대로 받아들이고, 머물

고 하는 가운데 알아듣는 것. 이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이죠.

 

# 부활 사건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가운에 알아듣도록

 

그런데 수난 사건이 어려웠던 것처럼 부활 사건을 기도하는 것도 이것이 참 어려운 거예

요. 지난 주에 수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말했던 것처럼 사랑의 절정에 대한 체험이

다 그랬죠. 그런데 이 사랑의 절정에 대한 체험이 이 수난에 있어서는 죽음을 통해서, 그

런 부정의 길을 통해서죠. 죽음이라는,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는 것. 그런데 이 부활 사

건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사랑이 긍정의 길을 통하는 거예요.

 

# 부활 - 긍정의 길(생명)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

 

생명을 찾아주는 것, 기운을 되찾아 주시는 것, 새로운 생명 이 관점에서 나가는 것이니

까 사랑의 절정이긴 하되 수난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이게 왜 어려운가

하니까 수난에서는 죽기까지 사랑했다 하는 그 체험이 우리한테 없으니까 어렵다 그랬

는데 부활에서는 '조건 없는 사랑' 하는 거예요.

 

# 조건 없는 사랑

 

이게 말이 조건 없는 사랑이지 이 조건 없는 사랑을 우리는 해 본 체험이 없다 하는 거예

요. 아무런 조건, 토를 달지 않은 사랑. 그저 사람이라는, 인간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에만

주목해 가지고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는 이런 체험이 없고 어디가 예뻐도 예쁜 구석이 있

어서, 얼굴이 예쁘든, 마음이 예쁘든, 가지고 있는 재능이 예쁘든 그런 식으로 예뻐서 그

래서 이렇게 사랑을 하는 것이지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은 그런 식의 사랑을 해 본 체험

이 없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발현하실 때, 부활하셔 가지고 제자들, 성모님께도 그렇지마는 제자

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가장 첫 번째 주된 사도직이 위로의 사도직이셨던 거예요. 위로하

는 것. 당시 제자들 모습 이렇게 보면은 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다 하

는 이게 전형적인 하나의 이미지. 그런 제자들 가운데에 예수님이 불쑥 들어오시면서 물

으시죠. "너희들 평안하냐?" 하고 물으시죠.

 

# 부활 후 나타나신 예수님의 첫 번째 활동은 위로

 

성모님께도 성모님 나름대로 위로가 필요하셨던 것 아닌가? 아이, 하느님 어머니인데

다 알고 계시고 뭐 다 알아서 마음대로 다 하실 분인데 무슨 그런 게 필요할까? 이래 이

야기를 하면은 곤란하죠. 성모님께서도 당연히 한 여인으로서, 한 어머리로서 겪어내고

치루셔야 할 그런 아픔들, 어려움들 거기에 대한 적절한 위로가 필요하셨고, 다른 제자

들, 여인들 전부 위로와 힘을, 살려 내는 것. 이게 필요하셨던 것.

 

그러면서 예수님 여기에 보면은 발현하신 그 사건들  마다에서 어느 한군데도 꾸짖는 모

습이 없죠. 너희들 내가 부활할 거라고 얘기했지 않느냐? 이렇게 인간들 손에 넘어가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그걸 그렇게 못 믿겠느냐? 그게 그렇게 믿

기가 힘들었냐? 왜 그런 점에 있어서 잘못하고 부족했느냐? 이런 것들을 따지지 않는 거

예요. 그런가 하면은 또,

 

앞으로 자, 이제 그렇다면은 앞으로 제대로 이제 내가 부활한 것까지 봤으니까 제대로

믿고 잘 걸어가겠느냐? 의심을 버리고 똑바로 살아가겠느냐? 다짐해라. 이런 약속 조건

도 달시 않으시는 거예요.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도, 미래의 약속이나 보증에 대해서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지금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위로하시고, 힘내라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괜찮다고. 이게 예수님 부활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도직이

셨던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이제 볼 때, 이런 것하고 관련지어서 예수님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

느냐 하면은 이제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수난을 통해서 볼 때 양의 기운이 많이 감소가

되고, 음의 기운이 점점 올라오고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죠. 그러면서 이제 음양이 완전

통합을 이룬 가운데 태극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드러나는 이 부부닝 전체적으로 부활

생명 사건의 모습이 지금 이런 모습인 거예요.

 

 

# 부활 사건에서 음과 양이 완전한 통합을 이룬다

 

여기에서는 어느 한 존재도 내침이 없으시고 다 받아들이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제

은 통합의 의미들이 일어나는 거죠. 삶과 죽음이 통합이 된 거예요. 이제.

 

# 삶과 죽음의 통합

 

양의 가치와 의 가치, 올바름을 세우고, 생명을 추구하고 이랬던 것이 양의 가치를

구하는 그런 극적인 움직임이었다면은 수난을 통해서는 올바름이 아니고 올바르지

못함에 먹혀 버리고, 생명이 아니고 죽음의 세력에 완전히 잡아 먹히고, 내주는 그러는

가치. 그것까지도 완전히 세워 내는.이러면서 양의 가치와 음의 가치가 하나로 통합되는.

의인과 죄인이 하나로 통합되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합되는 이 사건애 부활의 사건인

거예요.

 

그런데 이랬을 때 아까 좀 전에 이야기 했지마는 부활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

신 다음에 하신 가장 중요한 사도직이 위로의 사도직이셨다. 위로해 주시고, 격려 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셔 가지고 일으켜 세우는 것. 이게 당신 주된 사도직인 거예요. 여러분들

이 부활 체험한다. 부활 체험한다 하는데 이 부활 체험을 어떤 식으로 알아듣고 있는가

하는 거예요.

 

# 부활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저 신비하게 신비 체험을 기도 중에 하기를, 예수님의 음성을 막 들어본다든지, 예수님

손을 잡아본다든지 이런 어떤 놀라운 신비 체험. 살아계신 예수님을 어떤 감각적인 상태

로 만나볼려고 하는 그런 체험 쪽으로 기울고 있지 않는지, 아니면은 진짜 놀라운 기적

같은 체험, 그냥 뭐 병이 순식간에 확 나아버린다든지, 어떤 심각한 어려움, 고통 같은

것들이 갑자기 해결 된다든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부활 체험이다 이래 덤비고 그걸 추구

할려고 애를 쓰면은 우리는 길을 잘못 택한 것일지 모른다 하는 거예요.

 

# 부활 체험은 신비나 기적 체험이 아니다

 

그런 일은 안 일어날지 모른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뭔가 이렇게 위로를 받고, 힘이

나고, 그래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러면서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기는

이런 사건들이 만약에 일어났다면은 그게 부활 체험인 것 아닌가?

 

# 부활 체험은 일상의 삶 속에서 느끼는 위로의 힘

 

여러분들이 때에 따라서는 친구의 전호를 한 통 받고, 어떤 때는 남편의 그 미소를 통해

서, 남편이 던져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통해서, 아들내미가, 딸내미가 내한테 던져주는

그런 애교 떠는 모습들을 통해서 내가 위로 받고, 힘을 얻는다면은 이런 것들을 그냥 그

대로 야, 오늘 남편 기분 좋은 모양이네. 아이고, 내 딸내미가 왜 이리 오늘은 엄마 앞에

와서 재롱 떠네.

 

내 성당 친구가 아이,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내한테 그냥 인사를 아주 따뜻하게 해

줘서 나도 참 기분이 참 좋았다.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고 지나갈 수 있죠.

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지나가는 것 아닌가? 그럴 그런데 우리는 부활 사건이라고 알

아듣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계신다 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가

 

남편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자녀를 통해서, 본당에 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서

내 안에 위로가 올라오고, 힘이 솟아오르고, 용기가 생기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두려움

이 떨어져 나가고 그랬을 때 그 사건은 대단히 여릿여릿하죠. 그리고 아주 부드럽죠. 그

리고 아주 좀 미세한 움직임. 그냥 엄벙덤벙 지나가지고는 미처 감지하지 못할 그런 움직

임. 성령께서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시는 것 아닌가?

 

그래 따질 바에야 세상에 뭐 부활 사건이 지천에 널렸게요? 예, 어떤 면에서는 지천에 널

린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이거는 그저 개도하고, 소도하고 다 그냥 뭐 그런

식으로 웃고, 떠들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러면서 사는 것.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말아버리는 것이고,

 

우리는 이런 것 하고는 좀 더 특별한, 특수한 체험을 축구하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이 사

건, 일상의 삶을 전부 영적 차원에서 재해석하면서 깊이 있게 들여다 봐 버리고, 읽어드

리는 것 이게 부활 체험이고 부활 사건들인 것 아닌가?

 

# 성경에서 드러나는 부활 체험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신약성경 루카 복음서 24장 13-35절)

 

예수님께서 발현하셨던 성경의 사건을 보면은 전부 그러죠. 뭐 요즘 일어난 세상사를 놓

고 거기에서는 주제가 예수님이지마는 야, 뭐 예수라는 사람이 있다가 말이야 뭐 메시아

라고 떠들고 이런 소문도 있었는데 야, 그래 가지고 뭐 죽어버렸단다. 뭐 막 이런 이야기

들. 그런 그 당시 사람들의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나타나는 부활 사건들이 전부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다 벌어지고 있는 것들.

 

#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신약성경 요한 복음서 21장 1-14절)

 

밤새 그물질을 했는데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하나도 고기를 못 잡았죠. 그런데 아침에

수님 만나죠. 노동의 결실에 대해서, 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얻는 것이 없을

때. 한 달 뼈빠지게 노동을 했는데 백만원도 채 안 되는 돈을 쥐고는 한 달을 살아내기가

너무나 팍팍할 때, 그럴 때 누가 조반을 차려 놓고 와서  먹으라고. 그 돈으로 살아내는 데

슨 일이 좀 생기고, 그 일을 통해서 생활에 도움을 받고, 위로를 얻고, 힘이 나고 이런

사건들.

 

#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신약성경 요한 복음서 20장 11-18절)

 

막달라 마리아, 무덤 앞에서 울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잃어버려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슬픔 속에 깊게 떨어져 있는 거기에 예수님 등장하시는 거. 이거 우리 주위

에서 부모님 떠나보내고, 때로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떠나보내고, 심지어 자녀까지

떠나보내는 이런 일들 도처에서 열리고 있죠.

 

그런 상황 속에 우리도 슬픔에 떨어지고, 우리도 여행을 하고, 우리도 노동에서 오는 그

팍팍함 속에 쩔어가 있을 때, 그럴 때 찾아오는 사건들. 약하지마는, 여릿하지마는 부드

럽고, 따뜻한 기운들, 체험들. 그래서 내가 한 걸음 더 일어서서 걸어가게끔 이끌어 주는

그런 사건들. 이게 전부 부활 체험들이고 그게 내 안에서의 부활 사건들이 아닌가?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일상 속에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도 삶 안의

  작은 위안들 속에서 부활을 체험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하는가?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

고 있는가? 반드시 한 번 짚어야 될 문제죠. 이런 점에서 일상의 삶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런 부활 체험이 너무나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이제 이렇게 보

면은 우리가 부활 사건에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너무 많죠.

 

이 부활 사건들을 들여다 보면은 당장 엠마오로 가는 그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죠. 한참이나 같이 동행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다음에 티베리아 호숫가에 예

수님이 계실 때도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하죠.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런데 요한 사도가

주님이시다. 이래 가지고 베드로 사도가 뛰어들고 막 뭍으로 다 올라오죠.

 

그런데 그때도 또 묘한 이야기를 하죠. "어느 누구도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

이 없었다. 다 알았기 때문이다." 그거야 자기들이 평소에 예수님과 3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으니까 그때 같이 다니면서 배웠던 그 예수님이 거기에 앉으셔 가지고 생선을 굽

고 빵을 준비를 해 놓고 그렇게 계셨다면은 당연히 예수님이 그러고 계셨다. 이러고 얘기

를 할 일이지. 당신이 누구시냐고 묻느 사람이 없었다. 다만 알았다. 이것도 참 해괴한

이야기죠.

 

그런가 하면은 막달라 마리아, 남자들이야 좀 덤벙대고 그냥 뭐 그런 거 섬세한 면들이

좀 딸리니까 그렇다 친다 하자. 남자들한테 일어나는 그것도 이해도 안 되기는 하지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님으로 완전히 염색체가 전부 예수님으로 변화되어 있다고 이야

기 해도 과언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 조차도 떡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 못 알아보죠.

여기저기에서 막 발현을 하시는데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 하는 것이 참 많은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또 그 진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런 제자들이죠. 그러면은 오랫만에 발현

하셨으니까 같이 좀 며칠 느긋하게 지내시다가 자, 이제 내 갈테니까 좀 잘 살아라든지,

뭐 그러시면은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 이거 무슨 숨바꼭질하듯이 살짝 나타났다가 싹

사라져 버리시는. 이런 것들은 또 무슨 의미인가?

 

여러분들 같으면은 그러죠. 내 예수님 손 한 번만 딱 잡으면은 내 죽을 때까지 절대 신앙

에 대해서 흔들림 없이 똑바로 잘 살아가겠습니다. 그럴 거 같죠. 그런 얘기를 하겠죠. 그

런데 이 제자들은 몇 차례나 예수님 발현하시는데도, 또 뭐 믿지 못하고 막 이런 것을 보

면서 어떻게 제자들이 이럴수가 있는가? 이런 이야기도 하죠.

 

왜 예수님께서는 또 그토록 자주 발현하셨는가? 예수님, 제자들을 향한 호칭이 달라지죠.

만찬 석상에0서는 그러시죠. "나는 이제 너희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벗이라고 부르

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이러시죠. 종에서 벗으로 격상시켜 주시는 거예요.

마리아 막달레나 한데 그런 미션을 주시죠. "내 형제들한테 가서 전해라. 내 아버지요, 너

희들의 아버지이신 그분께 내가 간다." 내 형제들. 종에서 벗에로, 벗에서 형제로 받아들

이시는 것. 호칭들이 이렇게 변화되어 가죠.

 

이 모든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깊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죠. 그런데 이것을

일일이 뭘 여기서 풀어서 이야기할 것은 아니고 부활 체험은 각자가 기도 중에 머무는

데에 따라서 각자의 존재의 깊이에 맞추어서 부활 사건을 그렇게 나름대로 해석하고 알

아들을 거라고 보는 거예요.

 

# 스스로의 상황에 맞춰 해석할 수 있는 부활 사건

 

똑같이 일어나는 사건도 야, 그거 뭐 하이고, 저 자매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그래서 내한테 인사 기분 좋게 해서 나도 참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정리해 버리고 하는

사람하고, 그것을 훨씬 깊은 데서, 요즘 내가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괴로움에 떨어져

으니까 저 자매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저 안에서 움직이시면서 나를 위로에로, 생명에

끄집어 올리시는구나.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 움직여 나가는 사람하고 삶의 깊이가 다르죠.

 

각자 자기 위치에 따라서 적절히 부활 사건들을 해석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데 분명한 것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부활 사건들을 가지고 기도들을 오랫동안 참 많이 해

보세요. 저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철저하게 이월대립론적인 사고에서 자라왔

던 거죠.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철저하게 그렇게 교육받아 왔던 것.

 

그런데 이원대립론적으로 쪼개 놓고 하나는 택하고, 하나는 버리는 것이 얼마만큼 아프고

힘든지, 얼마나 이게 마음에 안 드는지. 그 이원대립론적인 그 아픔에 대한 그런 체험이 없

었다면은 이런 통합이 얼마만큼 좋은 건지 여기에 대한 맛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의 삶은 그리고 우리 한평생의 각 개인의 역사들은

전부 이런 체험들을 통해서 점점 통합에로 나아가는, 이 체험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것을 읽어드리면서 그렇게 음의 가치를 통합시켜 내면서 그 여리여릿한 작업을 또박또

박 하면서 키워나가는 것. 이것이 부활 사건이고, 부활 체험인 것 아닌가? 제자들도 예수

딱 한 번 발현하신 것 보고 완전히 신앙이 뿌리를 탁 내리고 변화되고 이랬던 것 아니

죠. 몇 차례나 발현하셔서 보여주시고 이랬는데도 예수님 부활 사건에서 승천하시는 것이

마지막이죠. 그때 조차도 제자들 중에는 "와서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는 믿지

아니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의 핵심 멤버들인 제자들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

나는 거예요.

 

# 제자들이 부활 체험을 여러 번 겪으며 깨달아간 것처럼 우리도 구체적 삶의

  체험이 쌓여가는 가운데 성장할 수 있다

 

우리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 아닌가? 구체적인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거듭거듭 쌓여 나가고 자라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우리는 진짜 영적인 이익을 많이

얻을 거예요. 이상하게 이 부활 사건, 너무나 다양한 사건들이 막 펼쳐지고 있고, 앞뒤 뭐

이런 맥락도 잘 안 닿고, 상황과 연결지어지면서 얼마나 놀라운 체험들이 올라오는지 잘

볼 필요가 있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까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러는데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는 "마리아야!" 하니까 그때야 탁 알아보죠. "라뽀니!" 하면서 탁 돌아서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못 알아보다가 저녁 먹자고 그러면서 빵을 탁 떼시자 그때 탁 아,

주님이시구나 하고 알아보죠.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예수님 못 알아보다가 조반이 탁 차려

진 걸 보고 아, 주님이시구나 하고 알아듣죠. 이게 참 우리한테도 중요한 것 아닌가?

 

# 나는 무엇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표가 뭐냐? 각자가 나는 이런 장면에 부딪치면은, 이 체험

이 내 안에서 일어나면은 아, 예수님이시구나! 하고 연결되는 직통 전화 라인이 설치돼 있

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예수님을 읽어드리고 알아듣는 체널, 싸인 이것이 뭔지. 이거

깊게 좀 알아들을 필요가 있죠.

 

그래서 이런 부활 사건을 통해서 참된 생명에 이르고, 통합에 이르고 이러는데 여러 가지

어떤 부정적인 요소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렵다 하는 것들도 함부로 그렇게 구박

하고 내팽개칠 것들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  삶의 부정적인 요소도 받아들여야 통합을 이뤄낼 수 있다

 

통합시켜 나가고, 통합시켜 내는 가운데 더 큰 생명에로 그 생명이 점점 자라는 것. 이것

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부활 사건이다. 이 일을 해 낼 수 있도록 기도 중에 더욱 더 깊게

머물 필요가 있죠.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 그래서 복음관상이

특히 부활에 대한 복음 관상이 아주 중요해 지는 것.

 

# 부활에 대한 복음 관상이 중요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 뵙고, 만나고, 알아듣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 이런 것

들을 계속 청하고 추구하면서 나아가야 될 것 아닌가 하는 거죠. 예,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

면 합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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