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성찬 신학의 발전(4-8세기) 따스한 봄이 되면 각양각색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듯이, 교회사의 봄과도 같은 4-8세기 그리스도교는 신자수, 체계, 교리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여 신학적 다양성도 풍성해졌다. 성찬 신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성찬례와 상당한 연속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앞으로 일어날 더욱 놀라운 변화를 준비하는 사목과 신학의 진화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된 성찬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삶처럼, 그 자체로 살아있는 찬양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찬 신학은 교부들이 사용한 몇 가지 중요한 주제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성찬례를 제사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있는 제사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 강한 연관성이 지속되었다. 성찬례를 제사를 보는 경향의 발전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고의 균형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테르툴리아노가 성찬 기도와 성찬례 전체를 ‘제사적인 기도’(sacrificiorum orationibus)라고 말할 때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적 제사의 주요 상징으로 윤리적인 삶보다는 성찬 전례를 더욱 강조한다. 성찬 기도를 제사로 이해하는 흐름은, 기도 자체를 사제들이 바치는 제사로 이해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6세기 중엽, ‘교회 규정에 따른 기도’(prex canonica)로 여겨진 ‘로마 전문’(Canon Romanus, 현재 ‘감사기도 제1양식’의 초기 형태)은 제사와 제물에 관한 용어로 가득하다. 이는 서방 교회가 성찬례를 ‘미사 제사’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이 ‘어떻게’, ‘언제’ 일어날까? 이 기간에는 점점 많은 교부들이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한다.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가 일반적인 음식과 다르다고 강조한 것은 당시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 신학에서 나타난 한 가지 변화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단계에서, 그 변화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4세기가 끝나 갈 무렵, 예루살렘의 치릴로(313?-387년)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428년)와 같은 신학자들은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가 변화할 때 성령의 역할을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치릴로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희랍어로 ‘에피클레시스’(επίκλησιϛ), 곧 성령 청원 기도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한다. 암브로시오는 「성사론」(5,14)에서 최후 만찬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기 전에는 그냥 빵이었던 것이, 예수님의 말씀 뒤에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는 ‘언제’ 성찬례 빵과 포도주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지 말하는 최초의 증언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교부들의 설명은 ‘로마 전문’으로 발전된다. 그리스도교 입문에서 신비 교육의 중심인 성체 신비 신비 교육(Mystagogia)은 ‘신비를 배우다.’를 뜻한다. ‘신비’는 무엇일까? 여기서의 신비(mysterium)는 기본적으로 구원의 신비를 예식으로 현재화하는 성사들, 특히 성찬례를 지칭하였다. 신비 교육에 대한 가르침을 펼친 4대 교부로는 예루살렘의 치릴로,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가 있다. 보통 세례 뒤에 성찬례를 중심으로 세례와 견진의 의미를 가르쳤다. 곧 새 세례자들이 그리스도교 입문인 세례, 견진, 성체성사의 자연스러운 연계성을 인지하도록 하였으며 최후의 만찬과 연관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7세기가 시작될 무렵 많은 지역에서 유아 세례가 표준이 되면서 성찬례와 그리스도교 입문 사이의 연계성이 대부분 사라진다. 축복받은 하느님의 자녀에서 죄인으로 - 신학적 인간학의 중대한 변화 세례를 받고 성찬례에 참석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기에 자격이 없는 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 신학적 인간학의 변화가 이 시기에 생긴다. 세 가지 원인은 바로 아리우스주의, 원죄 교리, 고해성사의 발달이다. 첫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256?-336년)는 ‘참하느님’은 오직 성부뿐이시라고 전제하고, 성자가 신이기는 하지만 성부의 창조물이고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종속론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아리우스는 단죄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한 교회가 성자께서 성부와 동등하시다는 것을 강조하자, 성자의 인성보다는 신성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만 찬미받으시는 경향이 생겼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영성체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둘째, 원죄 교리의 성서적 근간은 바오로 사도의 글에서 발견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아담을 비교하면서, 아담을 통해 죄가 어떻게 세상으로 들어와 모든 사람에게 퍼졌는지를 말한다(로마 5,12 참조). 원죄에 관한 그리스도교 사상을 자극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금욕주의자 펠라지우스(354-418년?)의 가르침이다. 당시 도덕적 타락을 우려하던 그는 타락의 해독제로 도덕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개인적 책임을 강조했다.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주도권으로 어느 정도의 영적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상은 418년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단죄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노는 카르타고 교회 회의가 열리기 이전에 원죄에 대해 저술하였다. 그는 원죄 때문에 인류는 죄의 ‘저주를 받은 무리’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표현은 그가 말년에 저술한 「신국론」(12,12)에서 반복된다. 셋째, 고해성사의 발달 과정과 연관하여 ‘죄의식’이 커진다. 당시까지 사람들은 일생에 오직 한 번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임종 순간에나 죄를 고백하려 하였다.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하여 죄를 짓고 나서 고해성사도 하지 않은 채 성체를 모시는 것은 또 다른 큰 죄라고 여겼다. 이렇게 신자들은 자연히 영성체를 멀리하게 되면서, 성찬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4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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