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 실천으로 드러날 때 진실하다. 물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보잘것없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만큼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그만큼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인이요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행동이다. 행동으로 실천되는 사랑의 행위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깊은 형제 의식의 구체적인 표시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실제적으로 어려운 이들 안에 계시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가난하고 어렵고 소외된 이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그들 가운데로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사랑의 왕,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굶주리고 계시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신음하고 계시며, 슬퍼하는 이들 안에서 울고 계신다. 사회적 약자들, 고통 받는 이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주변으로 밀려난 예수님, 굶주리고 고통 받고 있는 예수님께 나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처신이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가장 인간다운 행위로서 오히려 우리의 사랑실천이 ‘가진 자로서의 베푸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모두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은 결코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의 형제 자매들’이다. 이 기본을 망각할 때 주님을 왕이 아닌 종으로, 한낱 내 삶의 방편으로 삼아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벗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한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비인준칙 22,3-4) 오늘 우리가 왕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셨지만 우리 죄인들을 한없는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의 종’으로 사셨다. 그분은 수고와 땀을 통하여 사랑을 건네주셨고,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살리셨으며, 자신을 낮추시어 사랑으로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도 왕이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눔으로써 아버지의 뜻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산다는 것은 그분을 모든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사는 것을 말한다. 나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갈망과 욕구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갈망,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을 통하여 왕으로 섬겨야 할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세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왕의 역할이 주어졌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왕직을 이어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과 다른 이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선사하고 다른 이들을 키워주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열린 마음으로 형제 자매들의 자유를 지켜주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 이 연중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영혼의 거울인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깊이 바라보도록 하여야 하겠다. 나는 진정 나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그리스도 왕’으로 고백하며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진정 내 참으로 내 삶에서 어떤 경우에도 다른 것에 양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인가? 나는 만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들 모두를 예수님처럼 대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어떤 처지에서도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