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로마 전례의 게르만화(750-1073년) 로마 전례서들은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자마자 상당히 이른 시기에 프랑스-독일 지역에 전해졌다. 여기에는 「젤라시오 성사집」, 「그레고리오 성사집」, 「로마 예식서」 등이 포함된다. 이 전례서들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했고 꽃핀 갈리아 전례와 만났다. 이는 다방면에 걸쳐 상호 영향을 미쳤으며, 이 교류의 열매는 로마로 재수입되어 몇 가지 토착화 과정을 거친 뒤 중세 로마 전례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교환과 이동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성사집, 예식서, 독서집, 성가집 등의 이동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로마 전례의 게르만화’라고 하는데, 프랑크왕국의 카롤링거왕조와 깊이 연관된다. 카롤링거왕조와 교회의 연합 프랑크왕국은 이교도 메로빙거왕조(481-751년)와 카롤링거왕조(751년-987년)로 이어진다. 메로빙거왕조가 붕괴하자 궁재(宮幸)들이 프랑크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두드러졌다. 그는 주교들과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회 땅을 처분하는 등 교회 업무를 맡았다. 그는 푸아티에에서 아라비아 군대를 막았고(732년), 아비뇽에서도 그들의 진군을 막았다(737년), 그 뒤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했다. 자카리아 교황(재임 741-752년)은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의 아들 피피누스 3세(재임 741-768년)를 프랑크왕국의 왕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피피누스 3세는 로마와 교황청을 랑고바르드족에게서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피피누스 3세의 아들 카롤루스대제는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서구 유럽의 일치를 강화했고, 아라비아인을 북부 스페인까지 몰아냈다. 또한 무력으로 작센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킴으로써, 왕국의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교회와 관련된 사안들에 대하여 교황청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 했다. 800년 성탄절, 레오 3세 교황(재임 795-816년)은 로마에서 구약성경에 따라 카롤루스대제의 머리 위에 직접 관을 씌워 주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게르만족의 흔적을 간직한 채 탄생한 새로운 왕국은 로마제국을 계승하고자 했다. 로마 전례의 프랑크왕국 유입 로마 전례가 프랑크왕국에 도입된 정확한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피피누스 3세와 카롤루스대제는 외부의 군사적 정치적 위협에 대처하는 일에 더해, 프랑크왕국을 내부적으로 통일하고 개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7세기 들어 심각한 쇠퇴를 경험한 교회를 먼저 개혁함으로써, 교회를 왕국 통일을 위한 대행자로 사용하려 했다. 이러한 재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하나의 단계는, 통일된 전례를 확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 피피누스 3세와 카롤루스대제는 프랑크 교회에 분명하고 논리적이며 잘 정돈된 로마 전례를 도입하고자 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로 피피누스 3세는 여러 「성사집」을 엮어 새로운 전례서인 「8세기 젤라시오 성사집」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카롤루스대제는 하드리아노 1세 교황(재임 772-795년)에게 순수한 「로마 성사집」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교회는 「그레고리오 성사집」을 보낸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 성사집은 프랑크왕국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로, 황제는 이 책을 왕국 사정에 맞게 고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는 이 편저자가 알퀴누스(Alcuinus)라 하고, 전례서 전문가인 데쉬스(Deshusses)는 아니아네의 베네딕토 성인(St. Benedictus de Aniane)이라고 본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는 「그레고리오 성사집」과 보충판의 혼합이 있었고, 이것은 「총미사 경본」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성사집」과 「로마 예식서」에서 취한 미사 외의 요소들이 한데 모여, 나중에 「주교 예식서」(Pontificale)란 이름을 얻은 책이 만들어졌다. 950년 즈음 마인츠의 성 알바노 수도원에서 결정적 편집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로마-게르만 주교 예식서」이다. 「그레고리오 성사집 부록」과 「로마-게르만 주교 예식서」의 새로움 「그레고리오 성사집 부록」의 저자는 서언에서 「그레고리오 성사집」을 보충하려는 자기 의도를 설명한다(1019항). 광범위한 목록은 1021-1805항에서 나타나는데 수집된 자료의 유형들을 잘 보여 준다. 새 항목의 목차는 초 축성, 「그레고리오 성사집」에 없는 날들을 위한 기도문들, 공통 미사(위령 미사, 강복 등의 신심 미사), 서언(1515항), 감사송(1516-1737항), 강복 기도문(1738-1789항), 서품(1790-1805항)이다. 사용하는 데 편리함을 더하고자 성사집들에서 성찬 전례가 아닌 다른 전례 거행에 관한 지침과 기도문들을 골라 하나로 모아 「로마-게르만 주교 예식서」를 만들었다. 본디 책 제목은 「로마 예식서」 또는 「예식서」였다. 13세기 말에는 「로마 교황청 관례에 따른 주교 예식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존의 ‘로마 예식서’와 달리, 이 전례서에는 기도문 외에 다른 요소도 있다. 설교, 미사 해설, 주님의 기도, 신경 고백과 위령 성무일도에 대한 설명,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옛 예식 모음집, 많은 축복 기도, 수많은 ‘하느님 정의’(Ordalis라 하며,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거나 또 당사자가 해결하고자 하지 않을 경우 법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느님의 정의를 청하는 심판이나 예식) 등이다. ‘로마 전례의 게르만화’가 가진 특징 로마 전례가 게르만화 되면서 서정적이며 개인 신심 표현과 내적 감수성이 깃들었지만, 고대 기도문의 순수한 명료성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었다. 기도에는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났다. 전례에 개인적으로 바칠 수 있는 기도가 많아졌고, 큰 소리로 또는 손을 들고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죄와 잘못에 대한 과장된 의식에 따라 전례 중에 사제 혼자서 하는 속죄 기도(apologia)가 나타났다. 성부와 인간의 중개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등한시되고, 오히려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생겼다. 또한 성삼위께 드리는 기도문들이 작성되었다. 미사 집전자는 늘 제대와 교우 사이에 자리 잡았고, 개인 미사가 점차 확산되어 교우들의 참여 없이 사제 혼자 드리는 미사가 독립적인 가치를 갖게 되었다. 교우들과 전례 거행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는데, 전례가 라틴어로 거행된다는 점, 교우들이 지나친 ‘죄의식’으로 영성체를 할 자격이 없다고 여긴 풍습, 성직자 중심의 전례 거행 등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그리고 로마 전례의 게르만화는 성당 건축과 전례 공간의 배치에서도 이어진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5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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