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까?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세례 받음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분을 메시아로 공개적으로 소개하시며 소명을 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예수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이 드는 아들”(1,11)임을 확인받는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인받는 사건, 곧 하느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었다(1,8). “성령의 세례”란 불의한 자에게는 불로 심판하며, 회개한 자에게는 은혜로 용서하시는 세례이다(1,7-8). 이는 곧 하느님의 종말의 때가 이미 오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7)고 고백했던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성을 부각시키며 그분의 길을 닦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루카 4,16-30; 이사 61,1-2).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와 더불어 죄인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자비와, 병자를 치유하는 자유와 해방(마르 2,10)을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할까? 제1독서는 '주님의 종'으로 묘사된 메시아의 사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서 전승에 따르면, 종은 신임 받는 사람, 파견된 자, 능력 있는 자와 같은 뜻이다. 메시아는 봉사하고 희생하는 충실한 종이 될 때 그 정체가 분명해진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종이다. 주님의 종은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 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 한다(이사 42,3). 나아가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진정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유를 주는 복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신적인 낮추심’과 오시는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처신했던 세례자 요한의 겸손의 혼을 지녀야 한다.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신적인 낮추심 이것이 세례 받은 우리가 살아야 할 몫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는 행위를 완성시키신다. 따라서 그것은 그분의 최고의 겸손, 곧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또는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도록 하기 위해(갈라 3,13-14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지은 자가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예고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세례 받은 이들이 걸어야 할 ‘거룩한 순례 여정’이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 자비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시듯이(사도 10,34-35)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세례받은 이는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삶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녹여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바꿔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세례는 나와 현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며, 이웃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이다. 새롭게 주어진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세례 때의 약속을 회상하면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빛으로 오신 그분께 찬미를 드리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