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세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매겨 부당이득을 취했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으로 여겨졌다(마태 11,19). 그들은 영적 감각이 무딜 대로 무뎌 있었다. 따라서 그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인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것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죄를 선(善) 안으로 받아들이시어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한 폭력의 함정에 빠져 헤매는가! 선과 악을 가르고, 자연과 초자연을 가르며, 성과 속을 쪼개고, 좋고 나쁨을 가르면서 얼마나 많은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가! 이런 면들은 한 인격체인 ‘나’의 두 얼굴이며 좋지 않고 싫은 부분을 잘라내서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소통을 통해 영성적 통합, 곧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본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악을 가르면서 ‘영혼의 아픔’인 죄를 늘 ‘선(善)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죄란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께 주신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소유이며, 스스로를 사랑이신 하느님의 울타리 밖으로 추방해버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덩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리를 제자로 삼으심으로써 죄를 선으로 바꾸는 복음화를 실행하신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선과 본성을 받아들여 거듭 나도록 초대해주신 것이다.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서로의 죄스런 모습에 분개하지 말자.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못마땅한 말과 행동, 죄와 불의 앞에서 단죄의 울타리를 치지 말고 오히려 울타리를 치우고 헤아리는 마음과 사랑으로 포용하도록 하자.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버리고 ‘사랑의 기다림’ 속에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죄와 소통해보았으면 한다.
어찌 폭력과 분열을 부르는 선과 악의 가름만이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재물의 소유 정도나 사회적 지위, 학연, 지연 등에 따라 얼마나 견고한 ‘끼리끼리의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가는가? 교회 신앙공동체 안에서조차도 이런 인간의 차별의식과 이분법적 사고가 만든 분리장벽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를 거스르고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암덩어리와도 같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적인 모든 조건과 처지를 뛰어넘어 오직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소중한 형제자매임을 삶의 유일한 기준이요 행동방식으로 삼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제발 남보다는 낫다는 하찮은 우월감이나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교만을 버리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근본 소명은 홀로 의인이 되는데 있지 않고, 죄인마저도 품으며 함께 선으로 나아가는데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