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우리 뜻대로 강요되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놀랄만한 표징이 주어지더라도 그 표징을 보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나 입맛에 따라 기적적인 성공과 놀라운 결과를 바라곤 한다. 그리고 바리사이처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며 기도마저도 이기적인 지향으로 바치곤 한다. 이 얼마나 앞뒤를 못 가리는 어리석은 짓인가! 우리가 탐욕과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을 끌고 가려고 하는 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 베푸시는 기적과 표징마저도 감추어버리실 것이다. 각자가 깨끗한 ‘마음의 거울’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만나거나 알아볼 수는 없다.
오늘 복음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 하나만으로 그분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표징만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신다.”(8,13) 그들의 태도가 예수님과의 단절 곧 일종의 심판을 부른 셈이다. 그렇다! 불순한 마음, 눈앞의 자기 이익과 안락함, 쾌락,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만을 고집하며 다른 이들도 하느님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원한 죽음뿐이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카인의 처지가 그렇다. 카인은 자신의 예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자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영원히 죄의 굴레를 쓰게 되어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가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는 달리 자신의 어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그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오,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제 마음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소서. 주님,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명(命)을 실천할 수 있도록 올바른 믿음과 확실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감각과 깨달음을 주소서.”(십자가 앞에서 드린 기도) 그는 평생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복음을 실행한 끝에, 1224년 라 베르나 산에서 주님의 거룩한 오상(五傷)을 받았다. 그 오상은 단순한 기적적 표징이 아니라 평생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그의 삶에 대한 하느님 편에서의 ‘사랑의 인증’이었던 것이다.
나의 삶을 겸허히 되돌아보자! 나의 완고함과 불신 때문에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얼굴을 떠올려보자! 나는 눈앞의 것에 사로잡혀서 내 안에서 숨 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끼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과연 ‘어떤 표징’을 원하는가? 나는 진정 믿음과 회개를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처럼 현세적 만족만을 바라는가? 고통과 희생, 자기 봉헌은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재물과 현세적 기쁨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는지.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바람으로써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오늘 나의 눈길과 마음이 엉뚱한 허상을 좇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버려두신 채 내 인생의 바다 저편으로 떠나버리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