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착한 목자다!/ 주일복음말씀묵상(요한10,10-18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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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태열 | 작성일2015-04-27 | 조회수63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나는 착한 목자다!/ 주일복음말씀묵상(요한10,10-18절)
1. 예수님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신다. 그리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적법한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유일하게 적법한 출입문이다(7절). 주님을 제외하고 혹은 그를 스쳐 지나서 양 떼에 손을 대려고 하는 사람은 절도이며 강도이다. 그들은 양 떼에게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사실은 양들에게도 해당한다(9절). 오직 예수 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다.
절도와 강도는 목자가 아침에 나타나기 전에 밤중에 온다. 이 비유의 수사적인 말씀은 모세나 예언자들 혹은 세례자 요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17,19-23; 3,29-30). 여기서 이 말씀의 중점은 오히려 하느님의 위탁이 없이 인간에게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지식을 전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곧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들, 혹은 그 당시 유대 백성의 정치적 지도자들이나 종교적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2. 이 비유의 배경은 이 당시의 팔레스티나에 널리 행해지던 풍습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울타리를 쳤거나 담으로 에워싼 큰 우리에 여러 사람의 양 떼를 함께 모아 두고 문지기가 그 문을 지키는 일이 흔했다. 양들은 시력이 약하고 움직임이 둔하지만 자기 주인의 독특한 소리를 착오 없이 알아듣는 재주를 가진 동물이다. 이른 아침에 목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 떼를 부르면 양들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 떼를 확인하고 끌고 나와 목초지로 인도한다. 여기서 문지기는 여러 목자들로부터 보수를 받고 그들의 양을 큰 우리에 모아 지켜주는 사람이다(1-5절).
3. 목자의 모습은 삯꾼의 모습과 다르다. 삯꾼에게는 돈이 주 관심사이고 양들과는 아무런 내적인 관계가 없다. 예수님은 양들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신다(11,15절).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잘 알고 계시며, 그들과 밀접히 결합되어 계신다. 예수님과 양들 사이의 이러한 친숙 관계는 그 자신의 존재의 비밀, 곧 하느님과 그의 결합관계에 맞닿아 있다. 예수님과 양들 사이의 관계는 그 깊이에 있어서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정확하게 대응한다(14-15절).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입증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신이 그 안에서 자기의 양 떼를 돌보시는 바로 ‘그’ 목자이시다! 예수님과 비교할 때 모든 ‘경쟁자들’은 삯꾼, 도둑 및 강도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8절).
4. 16절에서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 곧 부활 이후에 이방 민족들에 대한 선교 및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시야에 나타난다(11,51-52).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예수님의 목숨 희생의 결과요 열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마무리로 무엇을 더 말해야 한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세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느님은 그 목숨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 둘, 곧 목숨을 버리는 것과 그것을 도로 찾는 것은 동시에 하나의 계명, 곧 아버지의 위탁에 상응한다. 그것은 복종의 행위이며, 오직 아들만이 실천할 수 있다(5,19절). 아들의 전권과 복종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이 둘은 그 밀접한 결합 속에서 아들이 깊은 곳에서 어떻게 아버지와 하나인지를 보여준다. 알렐루야!
5.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라고 말씀하시고, 11절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10절의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zoe)로서 영원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11절의 목숨은 헬라어로 쉬케(psuche)로서 혼, 혼 생명, 곧 사람의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양들(10,15,17-18)이 조에의 생명(10,10), 곧 영원한 생명(10,28)을 얻을 수 있도록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분의 쉬케의 생명, 곧 사람의 생명을 버리셨다! 이 거룩하고 영원한 생명에 의해 그들은 한 무리(교회 공동체)가 되어 선한 목자이신 그분 아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의 양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거룩한 생명으로 먹이신다.
주님의 거룩한 생명은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써 죽임을 당한 것은 그분의 사람의 생명이었다.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사람이신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조에의 생명을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구속을 성취하고자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분은 우리가 구속받은 후에 그분의 조에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6. 선한 목자는 어떤 일을 하는가? 궁극적으로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선한 목자의 표징이다! 자기 양 떼의 죄를 덮어 버리고 씻어 버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내주었다. 다시 그들을 하느님께 올바로 연결시키고(속죄와 의인되게 함), 하느님의 참 양떼, 곧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되게 하는 새 언약 제사로 자기 목숨을 내주었다. 이로써 양 떼는 영생, 곧 신적인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 목자이신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계시하고 하느님의 영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조에의 생명을 얻게 하고, 십자가에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그들의 죄를 씻어 버려서 그들을 의롭게 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느님과 연합하게 하는 분, 바로 그분이 참 목자요 참 메시야다.
다윗 왕조를 단지 문자적으로 재건하는 이가 참 메시야가 아니고, 놀랄 이적들을 드러내는 이가 참 메시야가 아니다. 또한 모세의 출애굽 구원을 문자적으로 재현해서 로마의 가이사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이가 참 메시야가 아니다! 당시 암흑의 절대군주시대에 대항하여 정의구현의 실현을 위하여 백성을 선동한 계몽주의자가 참 목자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계시하고,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통치 아래 살게 하고, 하느님의 성령을 가져다주어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십자가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자신의 내어 줌, 곧 이분이 참 목자시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치유의 힘이 있다! 초월자 하느님의 사랑만이 피조물의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
요한 사도는 진정한 구원이란 서양의 인본주의적 지혜나 쇄국적인 동양 사상이나 변질된 해방신학 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 바로 위에서 온 계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1코린 1-2장에서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말씀”을 대조하면서, 세상의 지혜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헬라 지성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고 무능함의 상징인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말한다.
알렐루야! 아멘. http://cafe.daum.net/yoon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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