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포도밭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강론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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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헌모 | 작성일2015-07-21 | 조회수1,27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찬미예수님 어느 동네에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다 피신을 했는데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할아버지 한 분만이 피신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찰이 차를 가지고 와서 아무리 ‘할아버지 피하셔야합니다.’ 해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묵주기도만 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아마 나는 살려주실 거다!’ 물이 점점 차 들어오니까 할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갔어요. 지붕위에서도 역시 묵주를 들고 기도했어요. 이번에는 경찰들이 보트를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를 구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나는 절대 빠져죽지 않을 거라고....열심히 묵주기도 하다가 그만 꼴까닥 갔어요,
할아버지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는데 성질이 날대로 나가지고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나를 이렇게 물에 빠져죽게 할 수 있습니까... 왜 나를 살려주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뭐라 그러셨냐! ‘야, 이 영감아~ 내가 너 살리려고 경찰 편에 차도 보냈고, 너 살리려고 보트까지 보냈어.... 어디 와서 헛소리고 행패야? 행패는?’
오늘 1독서에 보면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고 하느님의 행동과 사람의 행동이 다르다. 아이와 어른의 생각이 분명히 다릅니다. 부모와 자식의 생각이 다릅니다. 본당신부와 교우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고부지간의 생각이 다를 수가 있듯이
분명히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이렇게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식대로 우리 사고방식대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역시 하느님도 우리의 좁은 머리 안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늘 하느님은 우리 머리 안에서 판단당하고 재단당하고 측량당하고 저울질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돌아와 보면, 아침 일찍 나온 일꾼들이나 저녁 다섯 시에 나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찍 온 일꾼들이 데모를 합니다. 우린 더 줘야 될 것이 아니냐?
요약을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은 유대인이고 늦게 온 일꾼은 이방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바리세이나 율법학자들이고 늦게 온 일꾼은 그 당시 손가락질을 받았던 세리요, 창녀요, 죄인들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일찍 세례 받은 자들이요, 늦게 온 일꾼들은 늦게 세례 받은 자들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머릿속에만 하느님이 있는 종교인이요, 늦게 온 일꾼들은 행동으로 보이는 신앙인이 아닌가?
오늘 복음을 조금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의 농사하는 방법을 우리들이 알아야 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9월이 되면 포도를 수확하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장마가 시작되기 때문에 포도를 제때 거둬들이지 못하면 그해 수확은 망치게 됩니다. 포도를 늦지 않게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급하게 서둘러야하는데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주인들은 서로 다투어서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팔레스타인의 농사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이상한 일은 아침에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수고한자나 저녁에 늦게 와서 한 시간을 일한 자나 주인으로부터 받은 품삯이 똑같다는 겁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확실히 불공평합니다. 그러기에 일꾼들의 불평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주인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인은 일을 확실하고 선하게 처리했습니다. 다른 이의 품삯을, 아침 일찍 온 자의 품삯을 깍지도 않았고, 다만 늦게 온 자들에게 하루품삯을 넉넉히 주었을 뿐입니다. 정의에 어긋난 것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일한 자가 자기들이 고집을 부려서 늦게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몰라서 못 왔고 일을 시켜주지 않으니까 하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후 다섯 시까지 누가 마지막이라도 나를 불러주지 않나~’ 하고 기다렸던 이 자의 삶을 주인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한 시간의 품삯밖에 주지 않는다면 그들 식구는 분명히 오늘밤은 굶어야 됩니다. 주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일한 사람에게도 후한 처사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꾼들은 노예나 종이 아닙니다. 사실 그 당시에 노예나 종은 굶어죽을 염려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급 노동자들, 천한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만 되는 그러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시기에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어도 이타적이시오, 인간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 바로 천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얘기하십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이가 천당에 가 보았더니 꼭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없고 분명히 저 인간은 지옥에 있을 것이다! 했던 사람이 의젓하게 천국동산을 거닐고 있더랍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아니...니가 어떻게 천국에서 어정어정 거닐고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 하는 이야기가 자기도 모르겠다는거야~~자기도 왜 천국에 왔는지..자기는 평생 죽을 죄만 짓고 살다가 죽기 전에 우연히 신부님을 만나서 통회하고 마지막으로 고백성사 한 번 본 것밖에 없는데 자기를 천국으로 보내주더래! 그런 하느님의 처사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자기가 천당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일밖에 없다!
다음에 연옥에 가 보았더니 천당에 갔을 거라고 기대했던....분명히 천당에 있어야 될 사람이 연옥에서 불평을 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더랍니다. ‘아니, 당신이 왜 이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느냐!’ ‘천당에 갔더니 출신이 창녀였고, 강도들이었고, 사깃꾼들이 꽉 차 있더라!’ 하느님의 처사가 너무나 못마땅하고 속이 뒤틀려 하느님께 불평을 하고 연옥으로 내려 왔다고 하더랍니다. 하여간 천당에는 생각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지만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크시다고 해서 우리의 수고로 하느님의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은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상으로 거저 주시는 은총이지.....인간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 중의 하나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하시는 봉사자들, 본당에 간부들. 주님의 포도밭에 불리움을 받았다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감사하시면서 지극정성을 다해서 겸손하게 일하십시오.
교회의 직책은 유세 떠는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직책, 주님의 포도밭에 불리움을 받은 모든 사람은 죽으라고/ 낮아지라고/ 주님처럼 밥이 되라고/ 불러주신 직책이기 때문에 교만과 오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기쁨과 은혜로써 겸손하게 자기가 맡은 일 충실히 해야 됩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넉넉하게 채워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지음 받을 때 똑같은 모습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똑같은 흙을 가지고도 장인은 항아리도 만들고, 도자기도 만들고, 요강도 만들고, 재떨이도 만들고, 간장종지도 만듭니다. 요강으로 만들어진 흙이 자기를 만든 주인에게 왜 나를 요강으로 만들었냐고 항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종입니다!’
간장종지가 김치 항아리 노릇을 할 수 없듯이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목적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생각과 내 생각은 다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당신이 왜 참관이요, 당신 받을 것이나 가지고 가시오.’ 라고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순교는 화나는 것 참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화나는 걸 참으면서 영적인 순교의 훈련을 거듭거듭 할 때 하느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 가슴 속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내 사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리 잡고 하느님의 생각으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요. 하느님의 귀로 세상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명심하면서 오늘 성체로 오시는 주님을 겸손되이 맞이하도록 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8. 09. 21 (연중 제 25주일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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