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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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5-08-18 | 조회수1,102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2015.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사는 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먹는 것입니다.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둘을 추가합니다. 그러니 삶의 정의는 모두 다섯입니다. 특히 오늘 판관기에 이어 전개되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삶은 기도이자 전쟁임을 실감합니다. 기도와 전쟁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전쟁에 최상의 무기임을 깨닫습니다. 인류사가 바로 전쟁사입니다. 생존과 직결되는, 때로는 ‘살기위하여’ 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첫 판관으로 등장하는 싸움꾼 기도온입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주님은 천사를 통해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밀을 감추어 두려고, 포도 확에서 밀 이삭을 떨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기드온을 찾아 오셨습니다. 이어 주님과 기드온의 대화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소통의 대가’임을 봅니다. 지도자의 우선적 조건이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입니다.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참으로 집요한 기드온이요, 주님과의 진솔한 대화의 기도를 통해 새삼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기드온입니다. 주님은 실로 겸손한 자를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하여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마침내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 기드온의 감격의 고백과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주님을 만남으로 사기충천, 원기충천해져 진정 용사가 된 기드온입니다. 새삼 생존과 직결된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도는 필수입니다. “주님은 평화” 참 은혜로운 호칭입니다. 평화의 주님을 모셔야 영적전쟁에 승리요 전쟁 중에도 내적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날로 피폐해가는 내적궁핍의 오늘날 인간현실입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물음은 오늘 강론 주제이자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에 제자들의 이구동성의 반응입니다. 답은 다 하나 ‘겸손한 자’입니다. 모세와 기드온처럼 겸손한 자입니다. 겸손한 자가 주님을 만나고 겸손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부자라 하여 하느님 나라에 못들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 은총으로 회개하여 겸손해질 때 부자는 물론 모두에게 활짝 열리는 하느님 나라의 문, 구원의 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하느님 나라의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구원입니다.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를 버리는 것, 비우는 것, 작아지는 것, 낮아 지는 것, 바로 이것이 내적전쟁의 승리에 이르는 겸손의 길입니다. 모으고, 채우고, 커지고, 높아지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거스른 겸손의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회개하여 겸손해질 때 절로 주님을 닮아 버리는 삶, 비우는 삶, 작아지는 삶, 낮아지는 삶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이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끝으로 ‘감사 고백’이란 시를 나눕니다. -날마다 강론은/내 생각에도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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