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전례’] 전례는 왜 해야하는가?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렘과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2022년 임인년 새해에는 코로나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이젠 어느 정도 잠잠해지리라는 기대가 현실이 되는 해가 되길 기원하며 전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1월이 되면 저는 25년 전 추운 겨울날,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며 로마로 유학을 떠났던 때가 떠오릅니다. “전례공부하러 간다며! 그것 공부할게 뭐가 있겠어, 전례규정이나 배우는 것이겠지!”라던 한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례’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하게 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전례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모르는 애매모호한 것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왜 전례를 해야 하는가? 전례에 대한 언어적, 신학적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전례는 왜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전례를 왜 해야 하는 지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일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기억하라”와 “행하라”는 동사를 통해 전례를 왜 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기억하라”에 답이 있습니다. 신명 32,7에서 모세는 옛날에 대한 ‘기억’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기억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르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의 뜻으로 사람의 정신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때로 이 단어가 ‘권고하다’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사람들의 망각을 일깨워 잊어버렸던 사실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자카르’는 그리스어 Anamnesis(아남네시스)로 번역되어 그 의미를 이어갑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2티모 2,8)라는 말씀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단순한 기억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사건, 특히 십자가의 희생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드는 기억입니다. 전례는 무엇을 기억하여 고백하고 선포하는가?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왜 전례를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합니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선포한다. 이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고 이 신비를 증언하게 하려는 것이다(1066항). 교회가 전례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임을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말해줍니다. 그리고 전례는 신자들이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고 증언해야 한다는 사명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전례에 참석만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례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삶을 통하여 증언해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고 전례를 형성하게 한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의 ‘현재화’일 겁니다. 그리고 전례를 통해 ‘현재화’된 십자가 희생제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앞에서 선언한 것을 풀어서 말해줍니다. 전례를 통하여, 특히 거룩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저희의 구원이 이루어지므로”, 전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생활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데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1066항). 전례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신비들과 사건들은 그곳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하고 생활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례는 무엇인가? 전례는 한자로 典禮, 라틴어로 Liturgia라고 표기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와 가톨릭에서는 “교회가 단체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또는 성인, 복자들에게 하는 공식적인 경배 행위”라는 설명을 함께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Liturgia는 그리스어 leitourgia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백성 전체를 위해 행해지는 봉사인 정치적, 기술적 또는 종교적 일을 가리킵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루어진 유다 경전의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 성서는 성전에서 거행되는 사제들의 경배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초기 교회와 교부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모든 이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경배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20세기에 전개된 ‘전례 운동’은 전례가 하느님 백성의 공적 경배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서 전례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각기 그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그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린다.”(전례 헌장, 7항) 전례는 예전의 교회의 공식적인 예배 행위라는 외적인 정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인류 구원에 있어서 전례가 지닌 중요한 가치를 확인시켜줍니다. 독일의 전례학자 클레멘스 리히터는 전례를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라고 ‘전례와 삶’에서 말합니다. 이는 세계주교시노드(2021-2023)의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라는 주제와 전례의 개념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더하여, 이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친교를 맺고,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하시며,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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