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지금도 그 열에 아홉 격인 우리는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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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5-11-11 | 조회수60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어떤 이가 건강을 위해 아침 식사 때 꿀 한 숟가락을 먹으면서도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한단다. “이걸 위해 당신은 엄청난 벌을 수 없는 시간 날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저 수많은 꽃을 피게 하셨고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에 태양도 비추셨습니다.” 그 꿀 한 숟가락에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이 담겨 있다는 감사의 고백이리라.
모든 은총마다 감사가 따라야 한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될 게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에.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그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면 신앙생활도 차츰 바뀌리라. 기쁨이 아홉,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언제라도 삶의 시각이 바뀔 게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은총의 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사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치유처럼 기쁨의 체험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고난과 상실의 체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의 사건과 만남들에서 이 기회들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일 게다. 삶과 함께 자라난 믿음만이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대면하도록 이끌 것이고, 그 믿음의 눈만이 삶의 궁극적 의미를 보게 할 것이니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주님께 다가와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대로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셨다. 당시에 나병이 나았더라도 공인을 받아야 했기에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라고 하셨으리라. 육체적 치유와 함께 그들이 사회적 복권을 하도록 이끄신 거다. 이들은 그로써 새로운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치유의 기적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난 곳에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은총에 대한 감사이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제의 선언을 들었을 때 그들 심정은 어땠을까? 우리는 지금도 상상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눈물 흘리며 무릎 꿇었을 거다. 그러한 판단을 내린 사제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사를 드렸으리라. ‘이젠 병이 나았다. 이젠 나병 환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벅차,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들 가슴을 부풀게 했을 거다.
그런데 은총의 감사를 드린 이는 열에 단 한 사람뿐,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아홉은 외면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가지 못했을까? 아마도 너무 기뻐서?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잊어버렸기에. 아니면 병이 나은 것에 너무 놀란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했기에. 어떻든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이였다.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아무리 작은 은총이라도 감사드리지 않으면 더 큰 축복을 스스로 가로막게 될 게다. 열에 그 아홉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지금의 우리일 수 있는 그들 모습이다.
예수님 앞에 우리란 누구인가? ‘저희는 쓸모없는 종,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우리이다. 나병 환자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감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이다. 감사의 삶은 우리를 전혀 새롭게 바꾸리라. 오늘을 사는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친다. 이처럼 감사는 그분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마땅한 도리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저버린 그 나병 환자 열에 아홉 격인 이가 우리인지를 묵상해봐야 할 게다. 되돌아 와 예수님께 감사를 올린 그 하나라도 되고자 이 시각 스스로 깊은 다짐을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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