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Mk.2,16-17)
제1독서 1사무 9,1-4.17-19; 10,1
복음 마르 2,13-17
몇 년 전에 다녀온 성지순례가 생각납니다. 여러 명의 교우들과 함께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지요. 그런데 순례 중에 한 자매님께서 호텔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신 것입니다. 솔직히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뼈에 문제가 있다면 전혀 움직이지 못할 텐데, 힘들기는 해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을 호소하셨고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판단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한 형제님께서 다가오셔서 다리를 보시고 이리저리 만져보십니다. 그리고는 골절이니까 빨리 병원으로 모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형제님께서는 의사 선생님이셨습니다. 전혀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지만, 아픈 환자를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서 검진을 해주신 것이었지요.
이 형제님 덕분에 얼른 병원으로 옮겨서 골절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만약 이 형제님이 없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갖 민간요법이 다 등장했을 테고, 그 결과 치료가 늦어져서 더 힘드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등장으로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형제님께서는 병원 일을 떠나서 온전히 순례에 집중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이기 때문에 아픈 환자를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 의사 선생님께 순례에나 집중할 것이지 왜 환자에게 다가간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더 큰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의사가 병자들에게 다가갔다 하여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죄로 아파하는 죄인들에게 다가가 함께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빠져서 참 진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당연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주님의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어쩌면 쓰려져서 병원에 실려 왔음에도 자기는 건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의사를 비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이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다면 상대방의 잘잘못을 떠나서 분명히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위선에 빠져있을 확률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사람이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것처럼,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임을 먼저 인정하는 것입니다.
치유자이신 주님을 반대하고 떠나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 당신은 용서한다는 것의 행복감을 알게 될 것이다(톨스토이).
갑곶성지 성당의 제대.
제대로 봐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농장에서 가난한 청년 한 명을 고용했습니다. 청년은 아주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집안도 좋지 않고 가진 것도 없었기에 주인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직원으로만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 이 청년이 자기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감히 내 딸을 사랑 하냐면서 화를 내며 농장에서 내쫓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이 농장 주인은 농장을 정리하다가 전에 자기 딸과 사귀었던 청년이 남겨놓은 노트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노트에는 청년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지요. 그의 이름은 ‘제임스 에이 가필드’로 당시 미 합중국의 대통령인 것입니다.
농장주인은 장래 대통령이 될 청년을 몰라본 것이지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한 순간의 겉모습만을 보고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마치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주님의 뜻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섣부른 인간적인 판단이 아니라, 조금 더 생각하고 이해하는 주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후회할 것들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갑곶성지 성당 입구의 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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