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1 (화)
삼일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복음 18장 21-35절
빚진 자로서의 용서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모양새를 띠고 있습니다.
형제의 잘못에 대해 ‘일곱 번쯤 용서한다면 대단히 너그럽지 않나요?’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의 관대함의 한계를
넘어서는 촉구입니다. ‘일곱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흔일곱 번까지 그러니까 끝까지 용서하는 것이다.’ 횟수를 세어가면서 이번까지는 참겠다고, 언제까지만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정한 마지노선이 있다고 용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네가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하니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네가 장차 변화될 기미가 있으니 넘어가겠다고 그러니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조건을 따지는 용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용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밝혀 줍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내게 준 피해와 상처가 회복되고 아물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원천은 바로 나야말로 하느님께 용서를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갚을길 없는 만 탈렌트를 탕감해 주신 한량없는 용서를 하느님께 빚지고 있으니 그 감사함에 몸 둘 바 몰라 하는 것, 용서받은 자이기에 용서합니다.
남상근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용서는 반복입니다. 단번에 용서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일곱 번을 그리고 일흔일곱 번까지 받아들임을 반복할 때 용서는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