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07.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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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6-07-10 | 조회수1,32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6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신명 30,10-14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제2독서 콜로 1,15-20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복음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두 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이 아주 열심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것 같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듣고 있는 중’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정답은 “자신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라고 하네요. 이런 상태에서 과연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을까요? 서 로 자기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싸움이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대화 역시 나 혼자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곳에서 진정한 소통을 가져올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우리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말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축복(Benedict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누군가에 대해 좋은(bene) 말을 한다(dictio).’라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아마 이 뜻처럼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 자신이 인정받고 사랑 받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또 사랑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도 베풀 수 있어야 하지만, 내 자신이 늘 중심에 서 있다 보니 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중심이다 보니 나를 위한 각종 핑계로 남에게 베풀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나갑니다.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행복했을까요? 우선 등장인물을 보죠.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된 사람, 강도, 사제, 레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여관주인.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 역시 행복하지 않겠지요. 사제나 레위인은 모른 척 하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요.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여관주인입니다. 여관주인은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니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행복의 주인공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일 것입니다. 비록 재산상의 손해를 보았지만 진정으로 남이 원하는 대로 베풀어 준 그 행동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상태에서 어떤 사람의 모습을 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원합니다. 이처럼 내가 바라는 그 모습으로 남에게 베풀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패자가 뭔지 아니? 두려워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야. 넌 실패자가 아니야. 적어도 넌 지금 도전 중이잖니!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중에서) 자코포 다 폰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인생의 코너길 (헬렌 슈타이너 라이스) 우리는 지금 삶의 교차로에 서 있네. 다다랐다고 생각하네. 끝나지 않았다네. 그림을 준비해놓으셨네. 코너로 돌고 있을 뿐. 노래 부르는 것을 잠시 쉬어도 좋으리. 가장 달콤하고 풍요로운 부분일지도. 휴식을 취하세. 코너길에 서 있습니다. 종착역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고 더 큰 그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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