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6.1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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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6-10-11 | 조회수1,28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6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제1독서 갈라 5,1-6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자, 나 바오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복음 루카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여러분들은 손으로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건을 나를 때, 청소를 할 때, 기도할 때, 글을 쓸 때, 악기를 연주할 때 등등...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발을 가지고는 무엇을 할까요? 어느 목적지를 걸어갈 때, 달리기를 할 때, 자전거를 탈 때, 축구에서 공을 찰 때 등등... 이 역시 여러 상황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어느 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물건 나를 때에만 손을 사용해야 하는데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틀렸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걸어갈 때에만 발을 사용해야 하는데, 자전거를 탈 때나 공을 찰 때에 발을 사용했다면서 틀렸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게 자신이 생각하는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에게 “맞습니다. 그렇게 사용해야 하는데, 제가 다르게 사용했군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못하고 어느 한 가지만 맞다고 주장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되게 살아가는 즉, 다른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보다는 그렇게 왜 사느냐고 비판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지요. 억울하고 끔찍한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 위로를 하기보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서 더 큰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왜 모두 다르게 창조하셨을까요? 그냥 똑같이 만들어버리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쌍둥이라 해도 다르게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서로 이해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바리사이가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현대 사람들의 위생을 위해 손을 씻는 것과는 다릅니다. 유다인들의 정결법에 의하면 물을 뿌려서 몸의 부정함을 닦아내라고 되어 있거든요. 따라서 물을 사용하지 않은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상태로 식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정한 상태이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거룩하신 분이고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굳이 정결법을 따를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에 맞출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겉만 그럴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속도 깨끗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하십니다. 이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까요? 따르지 말아야 할까요? 이해받을 때 사랑받는 느낌이 든다.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인데 맞춰 나가려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고맙다. (가린) 이 손으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등보다 더 값진 3등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마지막 경기라고 할 수 있는 마라톤을 보고 있었는데, 아주 황당한 장면을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거의 막바지까지 선두로 달리고 있었던 선수를 향해 갑자기 관람객 한 명이 덮친 것입니다. 이 관람객은 ‘심판의 날이 온다.’는 종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전 세계가 주목할 수 있는 행동을 해서 종말 메시지를 알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로 안타까웠습니다. 곧바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지만 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이 선수는 점점 뒤로 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3위로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완주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시상대에서 누구보다도 행복해하면서 활짝 웃음을 지어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반데를레이 리마’로, 지난 브라질 리우 올림픽의 최종 성화주자였습니다. 얼마나 미웠을까요?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망쳤다면서 포기할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좌절의 순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좌절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딛고 일어서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딛고 일어섰을 때,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반데를레이 리마를 덮치는 관람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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