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에서 완성됩니다. - 윤경재 요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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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16-11-07 | 조회수1,58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에서 완성됩니다. - 윤경재 요셉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 17,1~4) 용서(容恕)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그 뜻이 어디서 출발하고 어떻게 해야 그 뜻에 합당할지 알 수 있습니다. 容은 집을 뜻하는 집 면字와 계곡 곡字의 합성이며, 恕는 같을 如와 마음 心의 합성입니다. 계곡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모든 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입니다. 빗물이 되었던, 흙탕물이 되었던, 맑은 물이던지 오수가 섞였던지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홍수 때나 가물 때나 자기의 그릇 크기만큼 다 받아들이고 나서 또 아래로 내보내 줍니다. 자기의 처지를 내세우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응합니다. 계곡이 보여주는 그런 태도를 불가에서는 인욕이라고 정의합니다. 한자에 집 면字 부수는 개인의 역량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容은 얼굴 용, 받아들일 용, 몸가짐 용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恕는 두 마음, 즉 타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내 마음이 이러저러 하니 타인의 마음도 비슷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는 일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 누구나 다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그런 속성을 충분히 예상하고 또 그 결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은 여기서 한 발짝 진일보합니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행동하여 게으름과 무관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잘못된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꾸짖으라고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장 어려운 일이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일이라는 것을 늘 체험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면 과연 내가 그럴 자격과 위치에 있는지 헤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실패를 몇 번 경험하다보면 아예 외면하고 말아버리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귀결되는 이유는 나 자신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 말씀이 그렇게 흘러가는 원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도 그런 죄의 경향에 빠져 있다는 것을 수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반복해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음을 상대방에게 사전에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 점에 너무나 서투르고 부족합니다. 우리는 마치 자신은 그런 죄에 빠진 적도 없으며 그럴 일이 전혀 없다는 듯이 행동해야 권위가 생긴다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지나 않았는지요. 또 마지막 용서라고 종 주먹을 내밀어야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커다란 착각이며 효율주의에 빠진 게으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양식을 분명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대목에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지 분명하게 또 단호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아주 확실한 해결책도 가르쳐줍니다. 이 대목에서 찾아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소양은 정의, 현명, 절제, 용기 등 사추덕입니다. 희랍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인간의 덕 가운데 핵심이 되는 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추덕 보다 근본적인 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나도 잘못할 수도 있다는 비통함에서 출발하는 悲心과 동등한 우정 관계에서 나오기에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慈心입니다. 예수님 정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과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의 전개가 바로 그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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