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전례’] 전례는 언제 거행되는가?
하느님과 만남의 시간들 어느덧 결실의 계절인 가을입니다. 신앙의 결실이기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굳건한 신앙의 모범인 순교자를 기리는 ‘순교자 성월’이기도 합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면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봄을 생각합니다. 물론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봄도 좋지만, 꽃이 떨어지고 그곳에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결실을 보여주는 가을이 어느덧 더 좋아지는 것은 나이 탓일까요. 자신의 이미지를 예쁘고 우아하게 꾸미고 알아주는 사람들에게는 밝은 미소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사람을 생각하면 자존심 상해서 밤낮 속앓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운 이미지라는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열려 화려함보다는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세상과 사람의 진면목을 바라보며 열매가 어떻게 익어가는 지를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기를 바라는 것도 나이 탓일까요. 인간으로서의 결실뿐 아니라 신앙에도 결실이 맺기를 바라는 신앙인이라면 세상에 태양의 열과 빛, 그리고 비와 바람을 내려주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은총을 내려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하느님의 시간!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 무한하신 하느님의 시간과 유한한 인간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루살이처럼 자신의 인생의 유한함을 한탄하면서 ‘이승에서 즐기며 살아야지’ 하며 세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거나, ‘내 인생은 벌써 망쳤어’라고 하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시간을 살기위해서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기반으로 형성된 교회의 전례생활에 젖어 살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적 시간, 거룩한 시간, 구원 역사의 시간, 전례적 시간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우주적 시간’(chronos)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우주의 운동에 기초로 하여 초, 분, 시간, 일, 년으로 구분하여 사물이 지속하는 기간이 얼마인지를 설명하는 단위입니다. 이 시간에서는 모든 시간이 동일하고 한 날과 다른 날의 구별이 없습니다(객관적 차원). 그러나 사람들은 우주적인 시간에 명시된 간격들과 일치하지 않게 자신의 존재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생각하는 자의식을 가집니다. 사람에게 시간은 매 순간 고유하고 구별된 가치를 느끼게 하는 다른 차원들을 제공합니다(주관적, 의미적 차원). 하느님의 개입으로 우주적 시간에서 거룩한 시간으로 이러한 ‘우주적 시간’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은 자연적 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과 힘이 발현한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기 시작합니다. 봄과 달의 옛 축제 ‘파사’(passah)가 이집트 탈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선하신 개입을 기념하는 완전히 새로운 파스카 축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주적 시간’에서 ‘거룩한 시간’(kairos)으로 넘어가는 변화의 과정이고 이 중심에는 하느님의 개입이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민족인 이스라엘은 우주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이 개입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를 드리며,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구원적 성격의 ‘거룩한 시간들’ 중에는 다른 것들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역사의 충만인 그분의 파스카 신비의 사건인 ‘십자가 희생’입니다. 이 사건은 영원에서 ‘단 한 번’(ephapax)있는 유일한 거룩한 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로마 6,10). ‘단 한 번’의 사건에서 전례 거행의 시간으로 주님의 육화의 신비(마태 1,18; 루카 1,35)와 ‘단 한 번’의 파스카 신비(히브 7,27; 9,14)를 실현한 성령은 또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복음 선포를 수행하게 하며, 세례와 성체성사를 비롯한 다른 성사들에 참여하고 항구하게 기도하는 신자들의 삶의 매 순간을 ‘거룩한 시간’이 되도록 돕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 교회의 구원활동, 특히 전례가 ‘거행될 때마다’(hosakis) ‘거룩한 시간’ 중의 ‘단 한 번’ 일어난 그 사건이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hosakis)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라고 말합니다. ‘시간 전례’와 ‘전례 주년’은 우리의 일상을 거룩한 시간으로 바꾸는 전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육화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은 스스로 영원한 분이신 하느님의 차원이 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성화하기 위해서, 곧 우주적인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현존을 깨닫고 그분을 만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는 이를 위해서 하루의 성화를 이루는 ‘시간전례’(성무일도)와 일년을 주님과 함께 살게 하는 ‘전례주년’이라는 전례를 마련한 것입니다. ‘시간전례’와 ‘전례주년’은 구원사건을 기념할 뿐 아니라 그 사건을 현재에 일어나는 새롭고 ‘은혜로운(1코린 6,2)’ 거룩한 시간의 차원이 되도록 합니다.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는 “전례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도록 준비시켜줍니다”라고 하며, 전례를 통해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밝혀줍니다.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된다면 우주적 시간을 넘어서 영원의 시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시간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무력해지고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그 시간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의 시간에 주님을 찾고 의지하면 꽃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열매가 자라는 것처럼,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과 힘이 바닥난 그때에 그리스도의 힘이 발휘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9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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