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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 윤경재 요셉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11 조회수1,262 추천수1 반대(0) 신고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 윤경재 요셉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26~33)

 

 

 

현대인들에게 신앙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할 것 같기는 하나 막상 깊게 빠지면 손해를 볼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쪽 발만 걸쳐두는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습관에 따라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며, 모든 신앙의 논리가 명징한 증명이 아니라 결국 무조건적 믿음을 고백하여야 한다는 데로 귀착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어버립니다. 그리고 교리와 신조들은 불확실성에 근거했으므로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모두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요한 18. 37~38)

 

과연 빌라도가 예수께 질문한 진리란 무엇일까요? 왜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답을 하지 않으셨으며, 빌라도는 그냥 유다인들에게 나가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하였을까요?

 

 

합리주의자들과 달리 낭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교조적이라고 말합니다. 감성보다 이성에 치우쳐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끈다고 비판합니다. 인간의 감성은 자유를 추구하며 변화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종교학에서는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항하여 종교는 일종의 도덕체계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다.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신학적인 체계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에게는 본래부터 종교심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은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인간의 원초적 종교체험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체험은 감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체험이 일차적으로 감각과 감성에서 출발하나 곧 이성적 판단이 결부되어야 해석이 가능한 체험으로 남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시시대로부터 수많은 체험을 통해 존재의 유한성을 인식할 수 있었고, 모든 존재가 무한자인 신에게 의존한다는 점과 그럼으로써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유한한 존재 안에 무한자인 신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성을 직관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종교체험이 출발하였다고 종교학에서 설명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에는 죄의 인식과 은총의 체험이 덧붙여져 교리체계가 사후에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즉 먼저 각 사람이 실제로 체험한 중요 사건이 있었으며 그 사건에 대한 전달과정에서 교리가 이차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강력한 체험은 결코 잊히거나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 내포된 의미가 분명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경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사건을 기록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하느님과 일체성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 라고 표현한 예수 자신의 고백적인 언어 가운데서 확인됩니다. 이제 인간이 신으로부터 고립과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우리더러 생생한 체험 속으로 들어와 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이론적으로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읽기보다 자기체험을 통해서 읽고 재해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도 하나의 체계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공동 체험이 일어나는 공동의 장이 될 것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면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그 의미를 뼈 속 깊숙이 알만한 사건을 다시 떠올려 주십니다. 체험의 현재화이며 의미의 재해석입니다.

 

구약에서 해석한 노아와 롯의 사건이 사람의 아들의 날에 일어날 사건의 전형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노아와 롯의 사건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알려주는 계기가 있었으며, 자세한 경고와 대처 방안이 사전에 고지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 사건을 중재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경고를 무시하였으며 중재자의 기도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복음 말씀에서 개별적 응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개인적 목숨의 보전보다 신속하고 분명한 응답이 더 절실한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 또한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다가오지는 않겠지만, 그 징조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멸망의 길을 밟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 안에서 지내왔던 체험을 꺼내 놓고 재해석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부모님께 전해들은 탄생의 순간부터 유아기, 학령기, 학창시절, 청년시절, 혼사, 직장생활, 사회생활,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등 전 생애를 하느님 앞에 봉헌하고 재해석하는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 재해석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닐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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