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5.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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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7-05-06 | 조회수4,37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17년 5월 6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복음 요한 6,60ㄴ-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 작년 안식년 때에 저는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했었습니다. 직접 밥, 빨래, 청소 등을 하면서 가정주부의 삶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재미를 붙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리였습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요리 조리법으로 음식을 만들면 실제로 사진 속의 요리와 비슷하게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몇몇 신부님들을 초대해서 제가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제 요리를 맛 본 신부님 중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더 낫지 않을까?” 많지요. 또한 맛도 괜찮아서 제가 직접 해 먹는 것보다 이것저것 계산해보면 오히려 더 가격이 저렴합니다. 따라서 맛도 별로지 돈은 돈대로 썼지 여기에 음식을 만든다고 허비한 시간까지 생각해보면 그냥 사서 먹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잘 나지 않아서 음식을 직접 하지 않지만, 그때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정말로 쓸데없이 보낸 시간이었을까 싶습니다. 아닙니다. 음식을 직접 만드는 기쁨도 있었고, 혼자서 급할 때는 재빨리 음식을 해먹는 능숙함도 갖게 되었지요. 꼭 제가 주부 9단의 어머니들처럼 음식을 제대로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가 의미를 만든다면 남들이 보기에 형편없어 보이는 것도 스스로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남들의 판단에 쉽게 흔들리면서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곤 합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타고 싶어 했던 어떤 자매님께서 어른이 되어 스케이트 강습을 받겠다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지요. 김연아 선수처럼 될 수 있어?” 스케이트를 배우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선수처럼 잘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만의 기쁨이 있다면 충 분히 배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못하는 많은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고 물으십니다. 떠난 제자들은 스스로 결정했다고 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동참한 것이지요. 그에 반해 떠나지 않은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 안에 간직되어 있는 믿음을 따랐던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소신껏 말하고 행동하면 어떨까요?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 외모는 별 볼 일 없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외모 자체보다는 자신의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은 외모보다는 마음이라는 것. “외모가 좋으면 데이트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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