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6월 14일 (수) 가해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코린토 2서 3,4-11 마태오복음 5,17-19
신문호 가브리엘 신부님
마태오 복음이 첫 번째 복음서가 아니지만 신약성경 맨 앞에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리라고 구약성경이 예고한 약속을 선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원후 70년경 로마 황제는 이미 식민지로서 조공을 바치고 있던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혁명운동을 없애고 예루살렘을 함락, 성전을 파괴했다. 이때 유대인은 흩어졌고, 따라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떠났다. 어떤 공동체는 요르단 강 동쪽 펠라로, 어떤 공동체는 시리아와 페니키아로, 나머지 공동체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의 공동체와 함께 피난했다. 마태오가 팔레스타인에서 생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위해 복음을 쓴 것은 8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이다.
마태오는 그리스도교로 회개한 유대인의 모습으로 예수라는 인물이 구약성경에서 예고되고 유대인들이 갈구하고 그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실현했음을 전해주고자 했고, 그리스도교는 공식적으로 유대교와 단절되었음을, 마지막으로 신앙공동체는 자신 안에 폐쇄되거나 경직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면 안 되고 모든 시대에 모든 장소에 기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왕으로서의 예수, 예언자로서의 예수,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모습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예전의 관습과 율법에 얽매인 그들을 다시금 하느님의 원하는 지평으로 이끌고 있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 세상의 소금과 빛 다음에 있는 부분이고, 오늘의 복음 이후 화해와 극기, 정직,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예수 시대에 율법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모든 계명과 실천을 뜻한다. 또한 율법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같이 성경을 가리키는 하나의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성경을 바탕을 둔 유대인의 종교를 가리키는 단어가 “율법”이었다.
예수님은 계명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지만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것으로 예수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친교가 이루어 졌다고 마태오는 본다.
18절 ‘완성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이루다’, ‘채우다’를 뜻할 수 있다. 산상설교의 문맥은 2번째 뜻인 ‘채우다’로 이해하게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예언자들의 말씀이 단순히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 말씀들을 완성으로 이끌어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려고 하신다. 그래서 20절의 말씀 “너희의 의로움(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성, 즉 말한 바를 실천하는 충실성)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룰 때까지’, 혹은 ‘나의 제자들이 모든 계명을 실행할 때까지’라기 보다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예수님께서 부여한 새로운 율법에 대한 권위를 계속 간직할 것이다.
◁ 율법의 정신 ▷
예수님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이다. 계명에 대한 묵상보다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외적인 의무를 지키는 데만 몰두하는 바리사이보다 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런 아버지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그분 앞에서 사는 방법을 제시해 줌으로 완전한 율법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받아들이며 그분의 완전한 율법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종교란 의무사항이 적을수록 그리고 실천하기 쉬울수록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구약의 정신과 계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여 자기 게으름을 변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지적하신다. ‘주님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라 오셨다.’ 고.
◁ 생각 ▷
율법은 가치이다. 무서워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 드러나는 실천 규범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천 없는 가르침과 규정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율법을 왜 지키는가? 라는 가치를 잊게 했다. 예수님은 율법을 새로운 시각으로 열어줌으로 새로운 가치를 갖게 하신다. 당신 직접 참다운 율법을 구체적 사랑을 통해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움으로 율법을 완성하신다.
◁ 실천 ▷
나는 새계명과 서로간의 사랑을 이웃 형제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 했는가?
신문호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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