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24."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
---|---|---|---|---|
작성자송문숙 | 작성일2017-06-24 | 조회수4,78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루카 1,57-66,80(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대축일입니다. 탄생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사된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고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던져진 무의미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이다.”
진정, 우리는 세상에 던져져 있되,그 신원과 사명이라는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자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는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기에,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자,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그 사명을 오늘 <제2독서>에서는‘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는 이’(사도 13,23-24 참조)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버린다면,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결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의미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무관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의 존재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말대로, 우리는“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자로서의 그 신원과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처럼, 우리 주님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원과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과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