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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70804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04 조회수2,65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08 04 () 가해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레위기 23,1.4-11.15-16.27.34-37 / 예레미야서 26,1-9
마태오복음 13,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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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레위기 23,1.4-11.15-16.27.34-37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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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 26,1-9

1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집 뜰에 서서, 주님의 집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3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
4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5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 6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7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주님의 집에서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8
그리고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두 마쳤을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를 붙잡아 말하였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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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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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8 04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작은 시골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면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그 위인이 고향을 방문하면 모두 모여 환영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마을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디서 기적의 힘과 신적 지혜를 얻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하느님을 배척하였습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육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상황과 성장 배경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영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하느님의 말씀을 보았음에도 영적으로 눈이 멀었으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었으나 제대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귀는 성경 말씀을 들어도 공허한 메아리처럼 듣고 망각해 버립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은총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인 기준에 머물면 나자렛 마을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홀대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준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방문을 알아채며 기뻐합니다. 비안네 성인처럼 그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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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07 29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녀 마르타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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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7 3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생업에 푹 파묻혀 살아갈 때에는 놓치기가 아주 쉬운 것들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파스카와 무교절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겪었던 힘겨운 종살이를 회상하면서, 그 고통의 질곡에서 건져 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급히 떠나느라 빵의 누룩이 부풀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무교절이지요. 추수절에는 땅을 주시고 한 해의 농사를 가능하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초막절에는 광야의 떠돌이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또한 천막 성소를 지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축제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지내게 됩니다. 설이며 추석에 가족이 모이듯, 이스라엘의 축일들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뻐하는 날입니다. 가족이 모이지만, 축일 거행을 위한 규칙들에는 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들어 있습니다. 축제 때는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하는데, 그 음식들을 먹을 것 없는 이들, 고아와 과부와 떠돌이들, 또는 가난한 레위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축일에 생업을 멈추는 것은 결국 내가 먹고 살기 바빠서 잊고 살았던 하느님과, 내 일을 하느라고 바빠서 돌보지 못한 이웃을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일요일, 곧 주님의 날인 주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일을 멈추고 쉬는 그 자리에는 하느님과 이웃이 들어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맞이하여 그동안 밀린 일과 취미생활 등도 해야 하겠지만, 촌각을 다투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잊고 살았던 하느님과 이웃을 기억하는 시간을 배정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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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08 01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말씀에 대한 더 강한 적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양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악행을 저지르며 잘못된 길을 가는 유다 백성을 꾸짖고, 또한 회개하지 않으면 닥칠 파국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해야 할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는 대신에 오히려 백성을 부추겨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고향 나자렛에서 말씀과 행위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예수님에 대한 냉담한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주님 말씀의 깊은 지혜에 놀라워하면서도 시기하는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을 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 앞에서 ‘발생’하였건만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선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로 돌려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유다인들의 살의나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노골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교묘한 방식으로 복음이 우리를 관통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은근히 느끼는 ‘복음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뜻에 따른 생각과 삶 속에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세상 흐름의 가치관에 따른 안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8월에 우리는 ‘복음의 기쁨’이 인생의 참행복임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 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교황님의 말씀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사하신 ‘영원히 새로운’ 복음이 지금 우리를 관통해야 함을 힘 있게 말씀하실 따름입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합당하게 맞이하는 것은, 거창한 행사보다 먼저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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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 08 02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 주교 기념일)
(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사제 기념일)


예수님의 생애를 보통 33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대부분 마지막 3년 동안의 공생활입니다. 나머지 30년의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곧 ‘목수의 아들’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귀족의 아들이나 왕자로도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셨다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목수의 아들로 살아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프랑스 혁명 때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인 나머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후대에 와서 이 말은 당시 혁명군이 왜곡해서 퍼뜨린 모함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그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이 얼마나 평민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겪고 있는 삶을 몸소 살아가지 않고서는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아들로 사신 것은 특권층의 삶이 아니라 온 인류의 삶을 겪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고통과 수치, 모욕을 온몸으로 느끼시며 우리 인간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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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 08 03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신분을 들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자기 고향과 집안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사람들의 배척과 모욕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주님을 따르는 수도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명예욕이라고 말합니다. 명예욕은 수도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수도자들이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은 마음속에 이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녀는 ‘내가 더 선임자이다., ‘내가 더 연장자이다., ‘일을 내가 더 많이 했는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알아주는군.’ 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명예욕에서 벗어나는 길은 겸손하고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유혹은 남들의 인정과 칭찬입니다. 수도자나 성직자는 가난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떨치기 힘든 유혹이 명예욕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려면 명예를 가볍게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지, 자기 이름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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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07 29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성녀 마르타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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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730)
(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기념일)


고향을 떠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그리워하게 마련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하시면서 떠돌아다니시다가 가끔씩 고향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았음에도, 쉽사리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적은 것과 같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 상황과 성장 배경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분의 말씀과 행위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습니까? 주변의 가장 가까운 분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합니까? 일상생활 안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삶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이웃을 통하여, 또는 우리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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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7 31)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정여립’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 때 역모 사건에 연루된 분입니다.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고 합니다. 천 명 이상이 죽거나 귀양 간 조선 시대 최악의 사건입니다. 정여립은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사람입니다. 그의 사상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통할 리 없었습니다. 당연히 고발되었고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왕위 세습을 반대했습니다. 왕권이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설파했습니다. 엄청난 진보 사상입니다. 선조는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쳐 맥을 끊고 연못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이른바 ‘파가저택’의 형벌입니다. 가족과 친척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대부분 처형됩니다. 그와 조금이라도 연이 닿았다면 모두 색출되어 엄한 문초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후유증도 컸습니다. ‘개혁적인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아무도 바른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은 그대로 조선 사회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선각자들은 늘 반대를 받습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푸대접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편견을 깨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사람들에게서 반대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형제와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겉모습에 매달려 예수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견을 깨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본질’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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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01)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마을 한복판에는 시장이 있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지나면 회당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흰 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어린 시절,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보였던가!
회당에 들어가시어 말씀을 전하시는 그분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형제들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언제 저런 실력을 쌓았단 말인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다 곧바로 인간적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영적 기회를 잃는 순간입니다.
편견의 어리석음입니다. 고정관념의 해악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신심이 깊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한쪽만 생각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도 때로는 너무 쉽게 인간적인 것에 빠져 듭니다.
은총은 영적인 모습을 갖출 때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의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이었기에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이 편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기적을 베풀고 싶어도 참으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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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03)


편견은 무섭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쓰라림과 좌절을 겪는 가운데 서서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편견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린 지도자도 적지 않습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에게는 대부분 좋은 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참모는 지도자의 편견을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마저 이상한 행동으로 여길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견은 무섭습니다. 기적을 방해할 만큼 두려운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의 또 다른 모습은 고정관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1코린 13,7 참조). 그러므로 편견을 깨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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