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요셉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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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7-09-01 | 조회수3,28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교리 63: II. 삼위일체 6.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A. 천국과 지옥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도 흔히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인데 어떻게 지옥이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믿기를 원치 않고 이해해야만 믿겠다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상선벌악’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고 선한 일을 했다면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자비이시지만 동시에 정의이시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자비와 정의를 동시에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89장 14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옥좌를 받들고, 사랑(자비)과 진실이 당신의 거둥을 인도하옵니다. (면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상반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정의와 자비입니다. 정의는 옥좌의 바탕입니다. 정의롭지 않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자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비롭더라도 정의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실상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정의롭지 못하다면 자비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잘못이 없는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정의롭기 때문에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37장 28 야훼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악하게 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며 악인들은 그 자손이 끊기리라. 정의롭지 않은 것은 혼돈입니다. 착한 일을 하고 순교의 삶을 산 사람이나 온갖 악을 저지르다가 죽은 사람이나 똑같은 행복을, 혹은 똑같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혼돈이고 무질서입니다. 이렇게 무질서하게 생각하는 자체가 자신의 무질서한 삶을 정당화하겠다는 숨은 의도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6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이사야 42,1-9는 세상의 빛으로 세우실 ‘야훼의 종’의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세우고 인류와 계약을 맺고 만국의 빛이 될 당신의 종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의 의무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사야 32장 11 태평무사한 여인들아, 몸서리쳐라. 팔자가 늘어진 여인들아, 몸부림쳐라. 옷을 벗고 알몸으로, 너희 허리에 베옷을 둘러라. 12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라. 기름진 농토와 무성하게 열리는 포도송이를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13 내 백성의 농토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고 집집마다 기쁨으로 흥청거리던 마을은 망하리라. 14 궁전은 버림받고 혼잡하던 도시에서는 인기척이 사라지리라. 그리하여 도시가 섰던 언덕과 망대가 섰던 자리에 동굴만이 남아 들노새들이 뛰놀고, 양떼가 풀이나 뜯게 되리라. 15 드디어 하늘의 영기가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수풀이 되리라. (마침내 하늘에서 영이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16 사막은 법이 통하는 곳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되리라. 17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18 나의 백성은 평화스런 보금자리에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 19 적의 수풀은 모조리 쓰러지고 원수의 도시는 허물어져 내리는데, 20 복되어라, 너희는 물길이 닿는 곳마다 씨를 뿌리고 소나 나귀를 놓아 돌아다니면서 풀을 뜯게 하리라. (소나 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리라.)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받았던 땅은 다시 성령으로 풍요로워집니다. 이 성령은 사막을 법이 통하는 곳으로 만들고 과수원을 정의의 터전으로 만듭니다. 결국 성령이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린 곳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사막이나 과수원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물이 없어 척박한 땅은 죄로 인해 죽어버린 우리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물을 내리게 하시는 분이 바로 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정의가 가져오는 결과가 평화입니다. 그때가 되면 굳이 소나 나귀로 밭을 갈지 않아도 생명이 넘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장면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고 피의 대가로 생명이 왔습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죄의 값을 하느님 스스로 치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편에서 보면 이 잔인하기까지 한 정의가 바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비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죄의 대가를 치르셨는데, 회개하지도 않고 그 피의 은총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정의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무질서한 삶으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위안 받고자 하는 것일 뿐이고 영원한 복락이 있다면 영원한 고통도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옥이 있음과 그 지옥이 영원할 것임과 그곳에 들어갈 이들이 있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 18장 9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마태오 23장 33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마르코 9장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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