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한 데나리온의 가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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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리원 | 작성일2017-09-23 | 조회수1,36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25살 때부터 느끼기 시작했던 사제성소 때문에 시작된 일 년간의 갈등을 뒤로하고 26살 때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계획했고 또 쌓아가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 자신을 주님을 위해 봉헌해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그분께서 주실 보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주님께서 돌멩이 하나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때는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일꾼들에게 준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몰랐었습니다. 만약 포도밭 주인이 써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일당을 받지 못하는 일용직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규 직장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자신과 가족이 하루를 굶지 않을 생명과도 같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명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자신들이 더 해 드렸다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그분의 자비를 질투하는 죄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 자녀로 일하며 살도록 초대받았는데 감사하기는커녕 자신들이 하는 봉사에 대해 보상만 요구합니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 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형은 아버지 밑에 있지만 일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것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십자가의 삶으로 고생하도록 불러주신 주님께 무한감사만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만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통행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머리가 돌아버린 나이 많은 시골 지주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사라 믿습니다.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한다고 믿고 풍차를 보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기사는 한 명의 여인이 필요합니다. 그녀를 위해 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돈키호테는 한 여관 매춘부인 알돈자를 레이디 둘시네아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알돈자는 처음엔 그런 맛이 간 노인의 말을 재밌게 듣다가 나중엔 자신에게 희망을 주는 그 노인이 싫어집니다. 자신은 부모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구르며 살아왔는데 이제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알돈자는 지금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말라고 저항합니다. 자신을 짓밟고 가는 사람보다 돈키호테가 더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완전히 돌아버렸기 때문에 끝까지 알돈자를 둘시네아라 부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알돈자를 돈을 주고 이용해먹으려고만 했지만 돈키호테만은 그녀를 귀부인으로 끝까지 대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돈키호테가 무엇과 싸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바로 ‘그냥 포기해!’라는 마음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사로 악과 싸우며 한 여인을 사랑해야 하는 부르심을 포기하라는 자신 내면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십자가의 싸움을 끝까지 버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었지만, 알돈자도 자신을 위해 싸우는 돈키호테의 진심에 감동하여 돈키호테가 꿈꾸는 레이디 둘시네아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돈키호테는 신부님이 주는 책들을 읽고 갑자가 자신이 기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르심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자기 자신 내면에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라는 이기적인 목소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입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 싸움에서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부르심이 없었다면 그저 침대에 누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한 시골노인에 불과했겠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한 여인을 목숨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게 해 준 그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싸움일지라도 그 싸움 자체의 가치를 잘 알고 그 부르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을 부르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마치 주님께서 필요로 불러주시는 것처럼 다른 보상을 요구한다면 부르심의 뜻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 자체가 우리가 천국 시민이 되는 표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양 다른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 자체로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행복보다는 세상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알돈자와 산초의 대화는 바로 불러주심 자체에 어떻게 만족해야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왜 같이 다녀요?” “그거야 간단하죠. 그게... 그게...” “뭔데요?” “아 말씀드린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왜?”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내 손톱 하나씩 뽑혀도 난 좋아. 왜 좋은지 설명이 안 돼요. 주인님이 살짝 맛이 가신 건 알지만, 근데 어쩔 수 없어. 껍질을 벗겨내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거 말이 안 되잖아!” “보좌관의 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어이구, 그래요. 난 보좌관은 아니죠. 허면 보좌관은 뭘 어떻게 보좌하는 건데요?” “일단 그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녀요. 그분이 이렇게 챙챙챙챙 싸우다가 픽 쓰러지시면... 일으켜드리죠. ㅎㅎ” “그래서 당신은 뭘 얻지?” “뭘 얻느냐고요? ... 얻는 거야 많죠. 얻은 게... 얻은 게...” “하나도 없지. 헌대 왜 같이 다녀?”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대도 괜찮아. 묻지 마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 ” 이런 산초의 마음이나 부르심을 받은 돈키호테의 마음이나 같을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내일 부양할 가족을 쫄쫄 굶길 생각을 하며 오후 다섯 시가 될 때까지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그 사람이 실제로는 밭에서 아침부터 내일 걱정 없이 일했던 사람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좀 적게 달라고 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해드렸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봉사를 해 드릴 처지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죽여서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분에게 더 해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한 감사 외에는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맡겨주신 일을 그냥 행복하게 수행하면 됩니다. 싸움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싸움을 하지 않고 어둠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이 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더 힘들어졌습니까? 부르심을 듣지 못한 이들이 겉으로는 세상에서 더 잘나가는 것 같아도 마음은 지옥 불에 닿은 듯 뜨거워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미사 시간의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주님께서 뽑아주셔서 기쁜 모습보다는 왠지 너무 많은 일을 했지만 일한 것보다 덜 받은 사람들처럼 불만에 찬 모습들이 있습니다. 구원으로 불러주셨으면 환희에 차 산초처럼 노래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복음전파의 삶이, 이웃 사랑의 삶이, 주님께 보답해드리는 삶이 그것 자체로 기쁘고 감사하지 않으면 아직까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을 달 잃어도 결국 목숨까지 잃는데도 그분을 따르는 것 자체로 좋다고 외치는 산초처럼 살 수 있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아는 일꾼들, 구원에 다다른 이들의 자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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